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9개월의 임금 인종과 문정왕후

GoodFortune 2019. 7. 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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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1515-1545

재위 1544-1545

 

명종

1534-1567

재위 1545-1567

 

인종은 아버지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중종10년(1515)에 윤씨는 왕자를 낳고 7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중종은 제2계비인 문정왕후를 왕비로 들이는데 17년간 아들이 없었가 왕비가 된지 17년만인 중종 29년에 왕자를 낳았다.

 

중종 가계도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는 경원대군에 봉해졌다. 중종15년(1520)에 책봉된 세자는 이미 스무살이었기에 경원대군과 왕위를 다툴 위치가 아니었다.

 

경원대군이 열살이 될 무렵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소윤 이라는 당을 만들었는데 당수는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었다. 이미 대윤 이라는 당이 있었는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이 당수였다. 소윤이 점점 강해지며 대윤과 소윤 사이에는 대립이 심해졌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세자를 바꾸려했기에 세자는 문정왕후에게 많이 시달림을 당했다.

여인천하 경빈 박씨
여인천하 문정왕후

 

여인천하 라는 드라마로 문정왕후, 경빈박씨, 정난정 인물들의 일화가 유명해졌는데,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야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로는 어느날 세자빈이 불길에 놀라 탈출하려 했으나 문이 밖에서 잠겨있었다고 한다. 이때 세자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불에 타 죽으면 부모님에 대한 악한 소문이 안날테니 피하지 않겠다 하였다. 시종들이 중종에게 달려가 고하자 중종이 급히 달려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니 세자가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를 작서의 변이라고 한다.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내 불이 났다는 뜻이었다. 이 일이 있기전에도 중종22년(1527)에 세자의 생일날 사지와 꼬리가 잘리고 입 귀 눈이 불로 지져진 쥐 한마리가 동궁의 정원 은행나무에 걸렸었는데,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복성군과 함께 쫓겨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5년 후에 권신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자의 동궁에 불이난 일이 문정왕후가 한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중종은 세자와 문정왕후를 아끼기에 감싸안으려 했는지 추문하지 않았다.

이렇게 중종도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니 세자의 위치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세자에게 후사가 있었으면 소윤 세력이 어찌하지 못하였을텐데 서른이 된 세자에게는 후사가 없었기에 소윤 세력이 더욱 세자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세자는 정비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를 두었지만 후손을 생산하지 못했다.

중종 39년(1544) 11월 중종이 사망하며 세자 인종이 즉위했고, 이후 소윤과의 대립은 더 커져만 갔다.

 

인종 가계도

 

인종은 조광조, 김식 같은 기묘사화 피해자들이 훈구파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믿었다. 사림파는 인종의 즉위를 환영했고, 훈구파는 자신의 편이 되지 않을 인종을 환영하지 않았다. 인종을 지지한 사림파는 대윤과 가까워졌고, 소윤과는 멀어졌다.

 

 

 

인종이 즉위한 후 한 사람이 어가 앞을 막아서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인종이 억울한 사연을 적어 올리라 명하였는데 판서 윤임은 이를 말리며 "예로부터 송사하는 사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한 예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인종은 "임금이 글을 보고 원통함을 가리고자 하는데 송사를 맡은 관원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드리지 않은 예는 있었던가?" 라고 했는데, 자신의 외숙부인 윤임에게도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신념을 가진 임금이었다.

 

드라마 천명의 인종

 

문정왕후가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하였음에도 항상 문정왕후를 어머니로 깍듯이 모셨다. 즉위 후 대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으로 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인조에게 박하게 대했다고 한다.

 

인종1년 6월 4일 인종은 처음으로 약방제조의 문안을 받은 기록이 있다. 인종은 더위 증세가 있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6월 6일 약방제조들이 문안했을 때, 인종은 몸이 편안하니 더이상 문안하지 말라 했다.

6월 17일 영의정 등 삼공이 인종에게, 경사전의 주다례를 지낸 뒤에 대비전에 문안하시겠다고 하였으나 옥체가 강녕하시지 못하고 더우니 멈추라 고하였다. 인종은 몸이 좋아졌으니 제례를 그만둘 수 없다고 답하였다.

6월 18일 인종은 예정대로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대비는 어가를 따른 시종과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리는 등 일행을 환대했고, 인종은 대비전에서 문정왕후에 다과를 나누었다.

 

사흘후 인종은 갑자기 약방에 명하여 약을 지어 들이게 했다. 주다례 직후부터 설사가 나더니 증세가 심해졌다.

6월 25일 설사가 심하고 구역증세도 있어서 수라를 들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6월 26일 눈동자가 술 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지고 손바닥이 더워졌다. 헛소리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이때 의원들이 별각의 고요한 곳으로 옮겨 조리해야 한다고 하여 아미산 청연루로 옮겼는데 몸이 회복했다 한다.

이때 문정왕후가 궁 밖 의혜공주의 집에 머물어 쉬면서 인종의 병세를 살피겠다고 나섰는데 대신들이 만류하였음에도 문정왕후는 다음날에도 의혜공주 집에 가겠다며 소동을 일으켰다.

6월 28일 어의 박세거는 인종에게 가망성이 없다고 말했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에도 의혜공주의 집에 가겠다고 소란을 부리며 대신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7월 1일 인종은 이복동생 명종에게 전위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시 12살이라 어렸으므로 수렴청정이 필요했는데 당시 중종 비인 문정왕후와 인종 비인 인성왕후가 있었다. 사림파 이언적은 형수와 시숙이 함께 궁에 앉아있을 수 없다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소윤에 속한 이기가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그로 인해 인종의 장례는 약식 장례인 갈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대비 윤씨와 윤원형은 대윤 윤임과 유관을 없애기 위해 인종 비 인성왕후에게 편지를 위조해 보냈다. 중종의 여섯째 아들 봉성군을 왕위로 올리려는 역모를 꾸며냈고, 봉성군은 귀양을 가고 윤임, 유인숙, 유관은 파직 후 귀양보내졌다. 이렇게 문정왕후는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대윤 세력을 가장 먼저 처리했다.

윤임 등의 일에 불만을 가진 사림파가 이 일에 반대하자 소윤 일파는 사림파도 대윤 일파로 몰아 공격했다. 이휘, 정희등, 박광우 등 젊은 사림파 관료들이 고문을 받았다. 이 일을 을사사화라고 하는데, 을사사화로 윤임, 유관, 유인숙, 이휘 등은 참형에 처해지고 많은 사림파가 귀양 또는 파직당했다.

 

명종2년(1547)에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서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벽서가 양재역 객사에 붙여졌다. 이 일로 봉성군, 송인수, 이약해 등이 사형이 처해지고 이언적도 쫓겨났다.

명종3년(1548)에 전 사관 안명세가 윤임을 옹호하고 이기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하면서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의 빈전 옆에서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 라고 비난했다.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당했다.

명종4년(1549)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양빙의 아들이자 윤임의 사위였던 이홍윤이 "연산군도 사람을 많이 죽이더니 중종반정을 당했는데 지금 임금인들 사람을 많이 죽이니 어찌 오래 그 자리를 지키겠느냐" 라고 했는데 그 아우 이홍남이 고발하여 이홍윤이 잡혔다. 이 사건으로 충주 지역의 이약빙의 문인들 300여명의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문정왕후에 대한 불만들이 많이 터져나왔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1559년에서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는 일이 있기도 했다.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을 거라는 소문은 계속 돌았고, 여러 야사에서 인종의 독살설을 전하고 있다.

 

"언제 우리 모자를 죽일거요?" 하며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맞아 주더니 다과를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 자신을 반겨 주는 것에 감격해 맛있게 다과를 먹었는데, 그 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인종이 죽은 후에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하였고, 이어 궁중 내 인종의 지지 세력들이 축출되고 죽어 갔다. 그 죽어간 세력 중에는 인종의 인척 뿐 아니라 사화의 희생자인 사림파도 있었다.

 

명종 가계도

 

명종은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고 13세에 윤옥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으나 가례를 올린 뒤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명종18년(1563) 13살의 나이로 죽었다.

 

명종20년(1565)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문정왕후 죽음에 대해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하며,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며 횡포를 부린 기록을 남겼다. 문정왕후가 죽자 소윤 윤원형도 정난정과 함께 유배당한 후 자결하였다.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려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후 명종22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명종의 후사가 없자 왕위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 계승하게 되는데 그가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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