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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짧은 1년 3개월 후 성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GoodFortune 2019. 7. 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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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450-1469

재위 1468-1469

 

 

세조14년 (1468) 9월초

7월부터 몸이 약해진 세조는 9월이 되자 위독해졌다. 7월 19일 고령군 신숙주, 능성군 구치관, 상당군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의 핵심 인물을 불러들여 세자 이황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공신들은 세조에게 곧 일어날 수 있다며 전위를 반대했다. 공신들과 세자 사이에는 합의가 이루어짐이 없었기에 공신들은 세조 사후의 체제에 대한 방안이 필요했다. 세자는 전위하지 않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고령군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 이준 등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라고 명했다. 신숙주와 이준은 구공신과 신공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구공신은 김종서 등을 제거한 정난공신과 세조를 즉위시킨 좌익공신들이고,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집압한 적개 공신들이었다. 세조 말 구공신과 적개공신들은 대립하고 있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은 후 처음대신들과 의논한 일은 유배 갔거나 연좌된 사람들은 석방시키는 문제였다. 당시 임금이 아프면 사면령을 내려서 하늘에 기도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세조 14년 7월 사면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병에 차도가 없자 8월 27일 또 다시 사면령을 내렸다. 세조의 병이 나아지지 않자, 세자는 세금 감면책도 실시하고 내전에 불상을 모셔 놓고 기도도 올렸다.

9월이 되자 황충이 수확을 앞두고 있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도 출현했다. 혜성 출현은 불길한 일을 의미했다.

 

세조 가계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세자는 세조의 업보를 풀어주기 위해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 때 처형된 사람들의 가족을 풀어주기로 한다. 이때 난인들의 부녀자들을 공신들이 나눠 가졌는데, 세자는 9월 3일 대신들에게 난신의 가족을 방면하자고 하였다. 공신들은 자신들이 나누어 가진 부녀자들을 풀어 주는 문제인지라 모두들 반대했다. 하지만 세자는 "공신들에게 준 자들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 것이요" 라는 말로 공신들이 더 이상 반대할 수 없게 하였다.

 

이때 석방된 가족들의 숫자가 200여명에 달했는데 공신들은 이 일에 큰 불만을 품었다. 좌익공신 3등 박원형은 계유정변 때 받은 여종을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게 하였는데, 동부승지 한계순에게 다른 여종을 내놓겠다며 항의하였다. 한계순이 응하지 않자 좌찬성 김국광에게 또 다시 요청하였는데, 세자는 단번에 거절하였다.

9월 7일에 세조는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에게 전위의 뜻을 전했는데,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조는 화를 내며 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9월 7일 세자가 즉위하였고 예종이 조선 8대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다.

 

예종 가계도

 

세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 한백륜의 딸인 소훈 한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했다. 국상 중에는 왕비를 둘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왕비를 선택한것이다. 소훈 한씨가 안순왕후 한씨로 세자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번째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데 세조4년 세자빈으로 들어왔으나 다음해에 인성대군을 낳다가 요절했고 인성대군도 세조 1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후궁으로 있던 소훈 한씨가 왕비가 된 것이다.

 

인수대비의 예종

 

 

 

예종은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0월 4일에는 인사권을 사사로운 곳으로 가지 않도록 사헌부 대사헌과 집의 이하 한 명이 정청(인사 논의 장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를 어기는 자는 종친, 재상, 공신일지라도 처형하겠다 하였다. 세조 때에 공신들은 법 위의 존재였던지라 공신들은 예종의 결정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종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군권을 잡고 있는 병조판서남이를 좌천시켰다. 신공신인 남이는 28세로 병조판서가 되어있었다. 또한 신공신의 핵심 중 한명인 이준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인데 28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있었다. 예종은 군권 장악을 위해 좌찬성 겸판병조 김국광도 해임하였다.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밤늦은 시간에 유자광이 예종에게 고할것이 있다며 궁으로 들어왔는데, 남이에 대한 고변을 하였다. "이전에 남이가 신에게 와서 세조께서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들과 다름이 없었으나 이제 나라에 대상이 나서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럽다. 이런때 간신이 작란하면 우리들은 개죽음당할 것이다. 우리는 충성을 다해 세조의 은혜를 갚아야 할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간사한 사람은 김국광과 노사신이라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찾아와서 혜성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데 보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였다. 유자광은 "신이 강목을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석에 광망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친 큰 병란이 있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또한 남이가 "내가 거사하려고 하는데 지금 주상이 선전관에게 재상 집에 분경하는 자를 엄하게 규찰하게 하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수강궁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이라야 할것이다" 라고 했다고 했다.

남이에 대해 안좋은 감정이 있던 예종은 남이를 바로 잡아들였다. 남이는 종친들과 대신들도 수강궁 후원으로 모이게 했다. 남이는 그날의 행적을 말하다 "유자광의 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곁의 책상에 강목이 있었기에 혜성이 나타나는 구절 하나를 보았을 뿐 다른 것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유자광이 책상 위에 강목을 펼쳐놓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예종은 유자광의 말만 신뢰했다.

또한 남이가 "한명회가 신의 집에 와서 적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그가 난을 꾀하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하였지만 예종은 남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명회가 말한 적자는 의경세자(예종의 형)의 장남 월산대군을 뜻하는 것이었다.

예종은 남이의 측근들을 데려다 국문하였는데 문효량이 혹독한 매에 못이겨 대답하기를 "남이가 산릉에 나아갈 때 중도에서 먼저 두목격인 장상 한명회를 없애고, 다음 영순군, 귀성군에게 미치며, 다음 승여(임금)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 고 하였다" 라고 했다. 남이가 스스로 임금이 되려 했다는 말이었다. 또한 전 영의정 강순과 함께 모의했다고 하였다. 곤장을 맞다 지친 남이는 모든것이 맞다 하였고, 강순과 함께 모의했다고 하였다. 예종은 남이, 강순, 문효량 등을 능지처사에 처했다. 그후 여러 기록에서 남이옥사를 기록했는데, 남이와 강순의 죄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논란은 풀리지 않는듯 하다.

 

예종의 남이에 대한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와 친했던 인물들을 계속 죽였다. 남이를 능지처참한 다음날에는 역모를 다스린 공로로 37명의 익대공신을 책봉하기도 했다. 이때 신숙주와 한명회도 들어갔는데, 남이가 한명회가 적자 세우는 일을 말했다 했음에도 한명회가 들어간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구공신과 신공신의 싸움에 희생된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한명회는 강순 남이 등의 처첩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내려달라고 예종에게 주청하였고, 예종은 난신의 처첩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남이옥사는 신공신을 없애려는 구공신의 모략과 예종의 남이에 대한 분노가 함께 만들어진 일인듯 싶다. 남이옥사는 사극에서도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예종은 왕권 강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재위 1년에는 사헌부 집의 김계창이 쓴 상소로 조익정이 담당자로 올린 상소에 "아름답고 밝은 정치가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 상소를 본 예종은 조익정을 불러 상소의 내용에 대해 물었으나 조익정은 아무 대답을 못하였다. 예종은 상소의 "유사를 좇아 처리하소서 라는 말이 대신들의 말을 따르라는 것이냐" 라고 물었으나 대사헌 송문림은 "법에 따라 하는 것을 이른 것이지 한 사람을 카리킨 말이 아닙니다" 라고 답했는데 송문림을 임금을 속인 죄로 파직시켰다. 예종은 공신적에서 조익정을 삭제했다가 다시 돌려주기도 하였는데 공신들은 예종의 처분에 불쾌함을 느꼈다. 예종은 계속해서 공신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재위 1년 11월 28일.

임금의 병의 위급하여 좌부승지 한계순과 우부승지 정효상을 내불당에 보내어 기도하게 하였고, 승지 및 전 현직 정승과 의정부, 육조의 당상관이 문안했다. 죄인을 방면하고 여러 도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진시(오전 7시~9시) 예종이 사망했다.

 

예종의 죽음은 이렇게 하루만에 갑작스럽게 죽은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종이 죽은 당일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영의정 홍윤성, 좌의정 윤자운, 우의정 김국광이 승정원에 모였다. (구치관을 제외한 7명은 성종 즉위 후 좌리공신 1등에 책봉되고 구치관은 2등 공신이 되었다)

아침까지 누구도 예종이 사망할 것이란 것을 몰랐는데 갑작스럽게 오전에 사망한 것이다. 신숙주는 도승지 권감에게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을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도승지 권감은 정인지의 아들인 하성군 정현조를 시켜 태비 정희왕후 윤씨에게 이 문제를 아뢰게 했다. 정현조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한 하성위로 정희왕후의 사위였다.

태비 정희왕후 윤씨는 강녕전에 나와서 원상과 도승지를 불렀다. 정희왕후 윤씨는 예종의 생모였다.

신숙주가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고 정희왕후는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하였으므로 크게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예종의 장자 제안대군은 4살이었고, 의경세자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은 16살이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사위 정현조를 통해 전교하기를 "원자가 어리고,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니, 자을산군이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기국과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자을산군은 13살로 의경세자의 차남이었는데, 장남을 두고 차남이 왕위로 오르는데 미리 정해진 일인 것 처럼 대신들은 모두 마땅하다 하였다.

 

 

월산군이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세조 10년 세조와 월산군이 사냥을 한 기록과 예종이 세자 시절 세조12년에 월산군과 사냥을 한 기록이 있다. 1489년에 사망한것으로 기록되므로 예종이 죽은 이후 20년을 더 살았다. 

 

월산군의 장인 박중선은 적개공신 1등인 신공신이었고, 자을산군의 장인은 구공신의 핵심 한명회였다. 정희왕후는 구공신 세력과 함께 차기 왕위를 결정하였다. 세종 승하 후 6일 후에 문종이 즉위하였고, 문종 승하 후 4일 후에 단종이 즉위하였는데, 자을산군 성종은 예종이 죽던 날 오후 바로 즉위하였다.

 

정희왕후는 예종의 정사에 관여한 일이 몇번 있었는데, 정희왕후의 조카사위인 이덕량이 잡혀왔을 때에도 면제해주었고, 정희왕후의 이모의 남편 경주 부윤 이염의가 경직으로 바꾸어 달라는 대비의 요청도 들어주었다. 또한 태비의 친족인 조총손을 풀어주는 일도 있었는데, 예종은 이를 신하들에게 항상 밝혔다. 어머니의 청탁을 꼬박꼬박 대신들에게 밝힌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 즉위 후에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예종의 소상(1년 후)이 지나자 대비전에서 공신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또한 성종 즉위년, 세조 때에는 여러 조의 겸판서를 특별히 두었으나 대행왕(예종)은 자신이 모두 장악하려고 이를 없애 버렸는데 지금 사왕(성종)이 나이가 어리니 겸판서를 없앨 수가 없다. 한명회를 병조 겸판서로 삼고, 한계미를 이조 겸판서로 삼게 하라고 전교했다. 한명회 집안에 군사권과 문무 인사권을 모두 다 준 것이었다.

 

 

 

예종실록과 성종실록에서 예종의 죽음 전후의 기록을 보면,

11월 16일 예종은 충순당에 나가서 입직한 군사들을 후원에 모아서 직접 열병했다고 한다. 열병식 때에는 국왕도 군복을 입고 긴 과정을 함께 해야한다.

11월 18일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문예를 시험하되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의 고사를 가지고 책문하려고 하는데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11월 19일부터 25일까지 예종이 정사를 본 일은 기록에 남아있다.

11월 26일 임금이 불예하니 새벽에 서평군이 한계희와 좌참찬 임원준을 불러 입시하게 했다.

11월 28일 예종 사망

12월 1일, 염습할 때 옥체가 변색된 것을 보았다. - 이로 인해 예종의 독살의혹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2000년의 연구에 의하면 예종의 족질로 인한 사망을 다시 추정하기로는, 발의 고질병에 세균이 들어가 봉와직염이 되었고 그것이 악화되어 패혈증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본다. 한겨울에, 부패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사망한지 이틀도 안 지나 염습을 하던 도중 사체가 변색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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