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과 강빈옥사

GoodFortune 2019. 7. 2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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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왕비는 인렬왕후 한씨와 계비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가 있다. 인렬왕후는 1610년 인조가 능양군일 때 결혼해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되자 30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그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을 낳았다.  인조13년(1635) 42세에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조는 계비를 맞이했는데,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인조16년(1638) 왕비에 책봉되었다. 후사는 없었으나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효종이 즉위하자 후에 자의대비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죽었을 때 복상문제가 생기는데 이때 각각 서인과 남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드라마 마의 소용 조씨(귀인 조씨)

 

인조의 후궁이었던 귀인 조씨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기의 서녀로 어머니는 한옥이다. 인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인조와의 사이에서 효명옹주, 숭선군 이징, 낙선군 이숙을 낳았다.

 

인조 가계도

 

귀인 조씨는 인조8년(1630)에 김두남의 서녀와 함께 궁녀로 입궁하여 여시가 되었다. 정식으로 입궁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 인연으로 입궁한 것이라 하여 탁핵을 받기도 했다. 입궁 뒤 1637년 종4품 숙원, 이듬해 1738년에 정4품 소원이 되었다. 1645년 정2품 소의로 책봉되었고 1649년 종1품 귀인이 되었다.

귀인 조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나 숙의 장씨 등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큰 권세를 행사하였기에 궁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를 유독 미워하였다.

세자빈 강씨는 우의정 강석기의 딸로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9년을 있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 고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친정적 입장을 취하자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고 의심했다. 1643년 세자빈 강씨 부친 강석기가 사망하자 잠시 귀국하였으나 인조의 견제로 얼마 못있고 돌아갔다.

 

귀인 조씨는 1645년 소현세자 부부가 돌아온 뒤에는 세자빈인 강빈과 불화하여 인조에게 세자와 세자빈을 모함하였는데,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강빈이 자신을 저주하고 왕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고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1646년 강빈옥사라고 불린 이 사건으로 세자빈 강씨는 폐출되었고 사사되었다. 그의 소생인 3형제도 모두 유배가 사망하였고, 노모와 4형제는 처형되거나 장살되었다. 세자빈 강씨는 소현세자와의 사이에서 경선군 이석철, 경완군 이석린, 경안군 이석견,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순군주 3남 3녀를 두었다. 강빈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숙부와 조씨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들이 성장하여 반드시 이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숙종44년(1718) 혐의를 벗고 세자빈에 복위되었는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신세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물과 실용주의에 눈뜬 여인으로 높이 평가된다.

 

꽃들의 전쟁의 세자빈 강씨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 조씨는 정2품 소의로 책봉되었고, 인조25년(1647)에는 장녀인 효명옹주를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파의 영수로 당시 권세가였던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에게 시집보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한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김상헌, 송준길 등 청서파가 집권하면서 김자점과 함께 그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효종 1년에는 귀인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에게 노비 150명을 내리며 대우했지만, 효종 2년(1651) 청나라와 내통하여 조정을 위협하고 손자인 김세룡을 왕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며 김자점 일가를 처형하면서 귀인 조씨도 이들과 결탁하였을 뿐 아니라 궁인과 무녀 등을 동원해 장렬왕후와 영풍궁부인 신씨를 저주하고 왕세자를 죽이고자 저주했다는 혐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귀인 조씨는 1651년에 죽었는데, 대신들은 귀인 조씨를 폐서인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효종은 인조의 총애를 감안하여 작호를 폐하지 않고 장례도 격식에 맞게 치르게 했다. 세 자녀들은 작호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는데 효명옹주는 효종9년에 숭선군과 낙선군은 효종7년에 한양으로 돌아왔고 효종10년에 관작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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