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조선 11대 임금)
1488-1544
재위 1506-1544
중종은 성종의 2남이며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다.
성종25년(1494)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년 중추부지사 박원종, 이조참판 성희안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에 추대되어 조선 11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폐륜과 사대부 부녀자 농락으로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을 중심으로 훈구세력들의 연산군 폐위 움직임이 일어났고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경복궁으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다음날 9월 2일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외에 9명의 후궁을 들였으며 9남 11녀를 두었다. 장경왕후 윤씨의 장남은 12대 임금 인종, 문정왕후 윤씨의 장남은 13대 임금 명종이다.
단경왕후 신씨의 친정은 연산군의 처가로, 연산군의 매부인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13세에 진성대군과 혼인하였는데, 이때 중종은 신씨를 사저에 두고 홀로 입궐하였다. 연산군의 매부인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며 중종이 신씨의 왕비 책봉절차를 서둘렀지만 반정공신들은 신씨의 복수가 두려워 왕비 책봉에 반대했다. 후사도 없었던 신씨는 남편이 즉위한지 8일만에 폐서인이 되어 궁을 떠났다. 18세에 대신들에 의해 왕이된 어린 중종은 힘없이 조강지처를 잃게 되었다. 단경왕후는 중종이 신씨가 있는 곳을 보며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는 말을 듣곤, 인왕산 바위에 올라 궁을 향해 붉은 치마를 널어놓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바위가 치마바위라고 불린다.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을 잃은채 궁 밖에서 71세까지 살다 죽었다. 단경왕후를 드라마로 담은 '7일의 왕비'가 있다.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반정의 공신인 파평 윤씨 윤임의 여동생이자 박원종의 조카였다. 장경왕후 윤씨는 어려서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해 양육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박원종은 월산대군 부인의 남동생이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후궁이 되어 들어와 숙의에 봉해졌다. 당시 공을 세운 신하들의 딸이 여럿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단경왕후가 쫓겨난 후, 1607년 장경왕후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10년(1515) 왕자(인종)을 낳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고 2년 후에 사림파들은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하였는데, 반정의 정당성 때문에 대신들은 반대했다. 또한 신씨가 아들을 낳게 되면 먼저 결혼한 신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어야 하는지,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어야 하는지 어려웠다. 사림파의 신씨 복위 주장은 없던 일이 되었고 새 왕비가 간택되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장경왕후 윤씨 가문의 사람으로 윤임이 세자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 출신의 왕비를 추천하게 되었다. 중종12년(1517) 17세로 왕비에 책봉되어 공주만 넷을 나으며 세자를 보필하였는데, 왕비가 된지 17년 만에 왕자를 낳았다. 그 아들이 경원대군 훗날 명종이었다. 윤씨는 아들을 낳고난 후 세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자신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과 음모를 꾸몄으며, 훗날 12세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여 20년간 국정을 장악한 여성 독재자로 알려져있다.
중종의 후궁 중 경빈 박씨는 중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유명하다. 연산군 때 궁녀로 궁에 들어갔다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4년(1509) 중종의 첫 아들 복성군을 낳아 중종이 더욱이 아꼈다. 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고 얼마후 세상을 떠나자 왕비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신이 낳은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세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새 중전 간택이 있었고, 1527년 세자를 죽이려 했다는 모함으로 아들과 함께 유배를 당했다.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었다. 이일로 1527년 경빈박씨는 혐의를 받아 작호를 빼앗기고 서인으로 되고 귀양갔다가 1533년 경빈 박씨는 복성군과 함께 사사되었는데 이후 억울함이 밝혀져 모자 모두 신원되었다.
경빈 박씨는 드라마에서 도지원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이들이 기억을 하고 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된 선비들을 신원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철인군주주의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중종10년(1515)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개혁방법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급하게 서둘러 훈구파인 반정공신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조광조는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그들과 대립하게 된다. 신진 사림파는 도학사상만을 강조하고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배척하며 갈등을 만들었다.
중종14년(1519)에 조광조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아 부당한 녹훈자가 있음을 비판하며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의 훈작을 삭제하였는데, 이 일로 훈구파의 격령한 반발을 일으켰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는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며 조광조를 비난하였고, 중종은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훈구파의 뜻을 들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조광조의 공신들을 삭제한 행위가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을 하게 된 점도 있었다. 그 뒤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었으며 1521년에는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일당이 처형되었다.
1524년 권신 김안로의 파직, 1525년 유세창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의 변에 따른 경빈 박씨의 폐위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김안로는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몰락한 뒤발탁되어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아들 김희가 장경왕후 윤씨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자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에 남곤, 심정,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임용되었는데 세자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허항, 채무택, 황사우 등과 함께 정적이나 뜻이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를 여러차례 일으켰다. 김안로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 등의 죽음에도 관여하였으며 윤원형 윤원로를 파직 유배시켰다. 김안로는 1537년 문정왕후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는데 그 해에 윤원형과 윤원로는 바로 재기한다.
문정왕후는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윤원로 윤원형 형제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을 대립하게 하였다. 인종의 대윤(윤임 일파)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 일파)의 싸움이었다. 소윤 일파는 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중종 38년(1543) 새벽 세자 침전에 불을 질렀으나 다행히 귀인 정씨가 세자를 구하였다. 중종은 이 사건을 단순 실화사건으로 축소하여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소윤 일파는 세자가 장성하도록 아들이 없고 병약했는데 세자를 바꾸어 세운다는 소문을 만들어 길거리에 전파시키기도 했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며 대윤에 의해 탄핵을 받아 윤원형과 윤원로는 파직되었는데, 인종이 8개월만에 승하하자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은 정3품 예조참의로 윤원로는 군기시첨정으로 복귀했다.
중종 하반기부터 시작된 대.소윤의 갈등은 명종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를 계기로 대윤세력이 몰락하며 끝나게 된다. 윤원형은 그동안 대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기, 임백령, 정순붕 등과 결탁해 대윤의 비행을 고변했다. 인종이 위독하자 대윤은 명종 대신 계림군을 추대하려고 모의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을사사화로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은 대거 숙청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년동안 윤원형은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다. 명종3년 이조판서 명종 6년 우의정을 거쳐 명종 18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윤원로는 명종 즉위년 윤인경 등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윤원형과 권세를 다투다 윤춘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명종실록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윤원형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들어갔다. 왕후가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께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크게 꾸짖으니 주상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군국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오니 주상은 마음 속으로 그를 매우 미워했다.
드라마에도 나온 정난정은 윤원형의 첩실이었는데 명종6년(1551) 정실부인 김씨를 쫓아내고 적처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그녀를 독살하고 정경부인에 올랐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와 매우 친밀했다.
명종20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신하들은 즉시 윤원형을 탄핵했고 명종은 즉각 수락했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강음으로 유배되었다. 정난정이 적처 김씨를 독살했다는 고발을 받아 사사될 위기에 처하자 부부가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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