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청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의 두달만의 죽음

GoodFortune 2019. 7. 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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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1612-1645

 

소현세자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나, 인조3년(1625)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인조5년(1627) 강석기의 딸 민회빈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 이석철, 경완군 이석린, 경안군 이석견,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순군주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인조를 대신해 청나라로 끌려가 초기 청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서 9년이란 세월을 볼모로 보냈다.

 

인조15년(1637) 1월 30일 50여 명의 사람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이 가운데 16대 임금 인조와 소현세자가 있었다.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는데 3번 절하고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식이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나라에 완전히 항복을 하였다.

 

인조반정 당시 중국 대륙은 후금(청나라)와 명나라가 대치 중이었는데 인조가 명나라에 뜻이 있음을 알고, 후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정묘호란을 형제 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이 체결되었으나 9년 후청은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하였고 인조가 이를 거부하자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을 천자국으로 받다는 것은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하는 반정 명분을 부인하는 모순된 상황이었기에 인조는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겠다 하였고, 그 결과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청나라는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끌고 가겠다고 하였다. 당시 척화파는 세자를 청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강화파도 세자가 가야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었는데, 소현세자가 동생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가서 죽더라도 청에가겠다 하였다. 나라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는데 청나라가 판서의 아들을 인질로 원하자 대신들은 서로 판서를 맡지 않으려 다투었던 것에 반해 용감한 결정이었다.

 

인조 가계도

 

인조18년(1640)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14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청으로 떠났다. 소현세자는 26살 나이에 그렇게 조선을 떠났다. 당시 인조가 경기도 고양의 창릉 서쪽까지 배웅을 했다고 전한다.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로, 보덕 이명웅, 필선 민응협 등이 수행원으로 함께 했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숙소를 지어 심양관에서 생활하였다. 청은 명과의 대립 상태였기에 명과의 전투에 투입할 군사 파견을 요구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켰으나 청에 군사를 파견해야만 했다.

 

인조18년 조선 수군 6000명을 파병했다. 수군을 이끄는 자는 임경업이었는데 이는 병자호란 때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 할 정도의 반청 인물로, 제대로 싸울리가 없었고, 청나라의 분노를 일으켰다. 분노한 청나라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의주에 파견했는데 세자는 중간에서 용골대의 동향을 조선에 알리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상황을 잘 알리며 노력하였다. 인조 20년에는 부사 이계가 조선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몰래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되었는데 이때도 세자는 조선 관리들을 옹호했다고 한다. 이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노력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명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조선이 취해야 할 현실적인 외교 정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인조18년 인조의 병환이 심하여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고 요청을 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다. 청은 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도 함께 보내라고 하였다. 청은 원손을 부른 후에야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 시킬 정도로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했다. 청이 세자의 송별연 자리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를 주면서 입으라고 하자 세자는 국왕이 입는 장복이라 놀라며 사양하는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인조가 전해듣고, 인조는 청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다. 세자는 조선에 도착한 후 인조와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의식은 모두 폐지하였다.

 

그해 4월 세자는 다시 청나라로 돌아갔다. 인조 21년 10월 청이 세자빈 아버지의 부친상으로 세자 부부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하자, 인조는 청과 세자가 결탁하여 왕위를 빼앗을것을 우려했는지 세자 귀국 문제를 근심하고 의논했다. 다음 달 심양에서 온 환관이 세자 부부가 가 빨리 들어올것이라 말하자 인조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런 인조의 마음을 알아챈 대신들은 인조의 마음을 안심시키고자 하였고 대신들도 세자를 견제하게 되었다. 청은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을 청으로 부른 후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세자 부부는 인조 22년 원손과 아들들을 만나고 또다시 청으로 조선으로 헤어져야만 했다. 세자빈은 이렇게 아들들을 청으로 보내며 조선에 들어왔지만 인조가 허락치 않아 아버지 빈소에 가보지 못한채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조가 세자빈 강씨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처사로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었는데 사대부들의 마음이 등을 돌린 것이다. 인조 22년 3월 부사직 황익과 오국별장 이원로가 심기원의 역모를 고변했다.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켜 인조를 쫓으려 하였으나 이가 어려워져 회은군을 추대하겠다는 역모였다. 인조는 심기원을 사사하고 관련된 자들을 처형했다.

 

소현세자는 청으로 돌아가 북경으로 가서 70여일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거주지와 남천주당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는 천문, 산학, 여지구와 과학 등 서구 과학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대동하고 귀국하도록 요청할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1644년 11월 1일 청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귀국하게 되었다. 인조23년(1645) 30대 중반의 나이로 귀국한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인조의 냉대를 받았다. 인조는 귀국한 세자에게 신하들이 축하를 올리는 일을 막았다. 세자가 가져온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좋지 않게 보았다.

 

귀국한 해 4월 23일 세자는 병석에 누웠다. 어의 이형익이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였는데 열을 내리게 한다며 침을 놓았고, 침을 맞은 세자는 3일만인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라는 증언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낳았다.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어의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3개월 전에 어의로 특채되었다. 소용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좋아하지 않는것은 궁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형익과 소용 조씨는 세자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양사에서 이형익을 탁핵하고 나섰으나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했다.

 

양사 뿐 아니라 산림의 송준길, 척화파 김상용의 아들 김광현이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강하게 주청하였으나 인조는 이형익 편을 들었다. 세자의 장례 절차에서도 인조의 마음이 드러나는데, 인조는 세자의 관에 "재궁"이란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 자를 쓰도록 했다. 동궁에게는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의 이름에도 '원'자 대신 '묘'자를 쓰게 했다. 상복 착용에서는 장자의 상에는 부모가 참죄복, 3년복을 입는 것이 맞는데, 영의정 김류 등 서인 중인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기년복, 1년복으로 올렸다. 하지만 인조는 그마저도 복제를 1주일만에 벗어 버렸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소현세자의 뒤를 누가 이을지가 문제였다. 세자를 모셨던 세자시강원 관료는 원손이었던 석철을 세손으로 세우자고 상소를 올렸다. 인조는 상소를 즉각 물리고 석달후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원손이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라는 말을 했다. 좌의정 홍서봉은 반대를 하고 나섰고, 영중추부사 심열, 판중추부사 이경여 등도 반대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류는 세조의 둘째아들로 보위를 이은 예종과 덕종의 둘째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은 예를 들며,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했다. 많은 대신들이 원손이 세손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인조는 끝내 듣지 않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어린 원손이 후사에서 밀리게 되면 원손의 목숨도 위험했다.

 

 

인조는 강빈이 청과 결탁해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켜려 했다고 의심했고, 그 후에도 자신을 내몰고 원손을 즉위시킬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인조23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되어 궁녀가 잡혔는데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궁녀는 조작된 사건에 시인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그럼에도 인조는 강빈의 오라비를 귀양보내고, 또다시 저주 사건을 일으켰는데 강빈의 궁녀 두명이 연루되었다. 이들도 조작된 사건에 시인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인조24년 정월에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올랐는데, 강빈에게 혐의를 돌리고 강빈을 별당에 강금했다. 강빈의 궁녀들은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인조는 비망기를 내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흉한 물건을 파 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신하들은 인조의 명을 거부하며 반대하고 나섰으나 인조는 재위24년 2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강빈은 사약을 먹고 죽었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씌워 장살시켰다. 인조는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은 인조25년 7월 12살의 나이에 제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해 9월에 제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동생 석린도 석달 후 세상을 떠났다. 강빈은 억울하게 죽은지 80여 년이 지나 숙종44년에 복위 선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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