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북벌을 꿈꾼 효종

GoodFortune 2019. 7. 30. 16:16
반응형

효종 (조선 17대 임금)

1619-1659

재위 1649-1659

 

드라마 화정의 효종

 

효종은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인조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7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인조23년(1645) 귀국 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 석철은 제주도로 유배보내지고 그곳에 얼마 안있다 죽었다.

9월 27일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는 왕세자와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입궐하였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효종의 왕비는 인선왕후이다. 부인 장씨 또한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끌려갈 당시 봉립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가 8여년 간 심양에서 지내면서 아들(현종)을 낳았다.

 

효종 가계도

인조는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4년 후 재위27년(1649)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했다. 효종 즉위 후 소현세자의 급서를 책임져야 할 의관 이형익의 처분에 대한 상소와 강빈의 신원 문제 등이 올라왔지만 효종은 이런 상소를 볼때마다 크게 노하였다.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의혹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홍욱은 강빈 옥사에 대해 강빈이 무죄이며 인조의 후궁 조씨와 김자점의 모함이라 하였고, 제주에 유배간 원손과 그의 형제들에 대해 호소하였다. 인조는 김홍욱을 국문하였는데, 이때 김홍욱은 곤장을 맞다 결국 죽었다.

 

효종은 문(文)치의 나라 조선에서 무(武)치를 하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효종은 북벌이 힘을 쏟은 왕이었다. 청이 군사력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직접 본 효종은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은 문신이 군사 지휘권을 가진 나라였는데 효종은 자신의 뜻을 받드는 박서를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 박서는 군사력을 확대해 나갔으나, 얼마 안있어 죽었고, 다음으로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하고 원두표와 이완 두사람과 함께 북벌을 꿈꾸었다.

 

 

 

효종의 군비 확장은 제주도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효종은 하멜을 북벌 추진 중심기구인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네덜란드의 조총을 모방한 조총을 제작하게 하기도 하였다. 하멜은 효종4년부터 현종7년까지 13년동안 조선에 체류했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강해져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 전쟁시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기도 하였다.

 

 

효종의 군비 확장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문신들의 반발이었다. 사대부들은 효종의 군비 확장에 정면적으로 반대했다. 대신들은 백성들의 민생을 생각하라는 안민책으로 효종의 군비 확장을 반대했다. 효종 8년 송시열은 '정유봉사'를 올렸는데 봉사라는 의미는 남이 볼 수 없게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송시열은 19개의 항목에 걸쳐 효종의 8년을 부정하며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음에 비판했다. 효종은 사대부들의 목소리를 내는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하고 양보를 하게 되었다.

 

효종은 사대부들과의 마찰을 이겨내고자 산당을 끌어들였는데,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삼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전권을 주면서 북벌 추진도 함께 넘겼다.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권을 주고 직접 군비 확장을 하도록 하고, 비밀 서신을 보내 북벌을 다그치지도 했는데 효종10년에는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에 대한 독대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임금과의 독대는 금지되어 있는데 송시열과 효종의 독대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효종은 재위기간동안 북벌에 대한 꿈을 꾸고 군비 확장에 힘을 쏟았지만, 송시열과 독대를 한 두달 후 머리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되어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조정대신들의 세력이 더욱 커졌다.

 

효종에게 침을 놓은 어의는 신가귀였는데 당시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 상태에 있었다 하여 효종 사망의 원인을 약방 도제조 원두표와 신가귀에게 돌렸다. 현종 즉위년 원두표를 중도부처하고 어의 신가귀 등은 사형 당하면서 효종의 죽음은 마무리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