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조선 18대 임금)
1641-1674
재위 1659-1674
효종의 유일한 아들로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즉위했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로, 아버지 봉림대군와 어머니가 볼모로 청나라에 있을 때 태어났다. 인조22년(1644) 귀국 후, 인조23년 아버지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은 1649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그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현종은 세자 시절 1651년 세자빈을 맞이했는데 청풍부원군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한 후 2년 후에 원자인 숙종을 낳았다.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은 서인의 편에 서 있었다. 현종은 왕비 외의 후궁을 두지 않은 검소하고 소박한 왕이었다고 하는데, 명성왕후는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현종 즉위 당시, 효종의 상례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에 효종 상에는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기해예송) 남인은 윤휴와 허목을 중심으로 대통 계승을 중시하며 효종을 적장자로 간주해 3년상을 주장했고, 서인은 송시열 송준길이 주축이 되어 기년설(1년 복)을 주장했다. 현종이 기년설을 채택하면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현종15년(1674)에 현종의 어머니인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는데 이때 서인은 대공복(9개월 복상),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여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갑인예송) 이렇게 효종의 재위 중에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 되어 국력이 쇠퇴했던 시기였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으로 인해 현종은 '예송 논쟁'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예송 논쟁은 상복의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에 따라 집권 세력이 교체되는 민감한 문제였다. 기해예송에서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된 것에 현종은 내심 불만을 품었을 수 있으나 어린 임금이었던 현종은 반박할 수 없었다. 아버지인 효종이 차남이었기 떄문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 또한 '효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적자 서열이니 국상에 대왕대비께서 1년복을 해야한다'고 하였다. 현종은 재위 15년 갑인예송에서는 효종 비인 인선왕후 장씨의 장례에 자의대비의 복상이 논쟁이 되었다.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을 채택하면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그 추종 세력을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안있어 1674년 현종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현종은 7월 24일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고 8월 18일 한달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현종은 몸이 불편했던 기간에도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쫓아내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허적은 현종이 숨을 거두기 하루 전에 궁으로 들어왔는데, 현종의 병세가 안좋으니 장인 김우명, 매제 심익현, 남인 장선징이 병을 지키게 하자고 요청을 하였지만, 이미 현종은 의식을 잃었다. 다음날 학질과 과로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14세의 어린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명성왕후 김씨는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선군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하였다. 이때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은 숙종1년에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거짓 고발을 하였는데, 이 사건을 '홍수의 변'이라고 부른다. 홍수란 붉은 옷소매를 뜻하는데 옷소매 끝동에 자주색 물을 들인 젊은 나인을 상징하는 호칭이다. 호수의 변은 숙종6년 삼복의 변의 발판이 되었으며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의 발판이 되는 사건이다.
당시 숙종은 명성왕후와 김우명의 증언 외에는 어떤 물증도 증인도 없었으며 명성왕후와 김우명의 내정간섭에 시달렸기에 무죄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로 인해 대신들은 김우명을 탄핵하며 처벌을 주장했는데, 명성왕후는 한밤 중에 대신들을 소집하여 편전에서 소복차림을 하고 대성통곡하며 자진하겠다고 협박하여 삼복 형제(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김우명을 방면하도록 하게 하였다. 후에 명성왕후의 이러한 행위는 남인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우명은 홍수의 변 일로 대신들의 비난을 받고 낙향하여 술로 여생을 보냈다.
명성왕후는 줄곧 서인의 편에 있으면서 조정의 일에 많은 간섭을 하였다. 자의대비 전에 궁녀 출신인 숙종의 후궁 장옥정(장희빈)을 궐밖으로 내치기도 했고,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를 숙종의 계비로 맞이하게 하는 등 숙종 재위 기간동안 많은 간섭을 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 숙종이 기실에 걸려 사경을 헤메자 무당을 불러 숙종을 낫게 하는 굿을 하였는데, 무당이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 고 하자 한겨울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채 물벼락을 맞았고, 그 일로 독감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이 일을 무녀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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