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당쟁의 대립 속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

GoodFortune 2019. 7. 3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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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조선 20대 임금)

1688-1724

재위 1720-1724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었다. 경종의 비는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 단의왕후와 계비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였다. 단의왕후는 숙종22년(1696)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경종 즉위 전에 소생없이 죽었다. 선의왕후는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로 책봉되었다. 

 

 

경종 가계도

 

 

경종이 태어나던 숙종14년(1688), 인현왕후 민씨가 속한 정당은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었고, 희빈 장씨가 아이를 갖자 경계했다. 희빈 장씨의 친정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하러 입궁하다가 서인들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자 숙종은 서인들로부터 원자를 지키고자, 3개월도 안된 아이를 원자로 책봉했다. 이때 경종의 원자 책봉을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정면에서 비판하였는데, 인현왕후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그때에 원자 책봉을 해도 늦지 않는다 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기사환국이 일어났고, 서인들은 정권을 놓고 물러나게 되었다. 송시열은 남인들의 공격을 당하고 유배당한 후 사사되었다.

숙종16년(1690) 에 경종은 숙종에 의해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는 중전 자리에 올랐다.

 

숙빈 최씨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 동이

 

1694년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이 태어나자,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세자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잃고 서인이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정권이 서인으로 바뀐 후 강등된 민씨는 복위되고 희빈 장씨는 강등되었다.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은 숙빈 최씨와 함께 희빈 장씨를 공격했다. 숙종27년(1701)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는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왕비가 죽은것이라 하여 희빈 장씨는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이후 경종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고 숙종으로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숙종43년(1717) 숙종의 주도하에 대리청정 하였으나, 숙종은 몰래 노론의 이이명을 불러 세자가 자식이 없고 병약하다며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할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숙종은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의 실정을 트집잡아 세자를 교체할 속마음이었다.

 

경종

 

대리청정을 맡은 경종은 매우 신중하여 숙종과 노론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1720년 숙종이 사망한 후 조선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숙종 재위기간 45년동안 당쟁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숙종이 당쟁을 이용해 당파를 때에 따라 올려치고 내려치는 동안 각 당파의 대립은 점점 심해졌고, 당파 싸움으로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죽이는 일이 생겨났고, 대립의 상황에서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왕위로 올랐다. 즉위 당시 정권은 노론에게 있었고,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를 빨리 결정할 것을 청하였다. 경종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노론의 청대로 경종1년(1721)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게 되었다. 세제 책봉은 새벽에 급하게 일어난 것으로 당시 노론세력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소론 세력을 제외한 노론 세력들에 의해 이루어진 세제 책봉이었다.

 

같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후 서로 대립했듯, 노론과 소론도 대립이 심했는데 옷차림도 달라 멀리서 봐도 당색을 알 수 있었다. 노론은 저고리 깃과 섶을 둥글게 접었고, 소론은 모나게 접었다. 노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었고 소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가늘면서 접은 수가 많았다. 노론과 소론 대립이 심해지면서 소론은 남인 편을 들기도 하였다.

 

당시 청나라 사신에게 세제 책봉받는 과정에서 경종의 병으로 세제 책봉을 한다고 하자, 병이 무엇인지 물었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건명이 청 대신들에게 말하길 '위' 라고 하였는데 중국으로 양위 또는 음위는 발기불능을 뜻한다.

 

 

노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노론이 대리청정을 건의하였고 경종은 이를 받아들이겠다 하였으나 소론은 노론과 정면 승부를 하였다. 소론 거두 최석정의 아우인 참찬 최석항은 경종에게 명을 거두어달라 요청하였고, 경종은 대리청정의 뜻을 거두었다. 노론이 여러차례 대리청정을 요구하였으나 경종은 끝내 듣지않았고, 소론은 이에 반격하여 노론을 공격하게 되었다.

 

경종이 친정을 하게 되자 경종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중추부판사 조태채, 중추부영사 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경종은 소론 최석항, 이광좌, 이조, 김연을 주요공직에 임명하여 정권교체를 하였고 이를 신축환국이라 부른다. 또한 1722년에는 노론이 주도하여 경종을 폐출시키려는 역모사건이 소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밝혀져 노론 4대신은 사사되었고, 노론의 핵심 인물들을 숙청하였다. 이 사건이 인임옥사, 신임사화이다. 당시 사형당한 인물이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된 이가 30명 등 연좌된 인물이 173명이었다. 당시 사건 판결문에는 세제 연잉군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 이 일로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등은 연잉군을 세제로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리려 하였다. 소론들은 경종과 선의왕후 사이에 양자를 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연잉군은 소록 과격파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경종에게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하자 경종은 연잉군을 크게 꾸짖었다 한다. 뜻밖에도 소론 온건파가 연잉군 편을 들고 나섰는데,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는 경종에게 과격파 박상검을 처벌하라 주청하였다. 이렇게 소론 온건파가 연잉군의 편을 들면서 연잉군은 세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경종4년(1724) 4월 궁인 김씨가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데, 삼사에서 사건을 조사하려 하자 경종은 그런일이 없었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그런 와중에 경종이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우의정 이광좌는 김씨 궁인에 대한 조사를 주장했으나 경종은 그때에도 조사를 거부했다. 8월2일 경종의 병이 심해졌는데 8월 20일 대비전에서 게장과 생감을 보냈다. 어의 이공윤 등은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꺼리는 음식이라며 올리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세제 연잉군은 어의들의 반발을 누르고 이를 진어했다. 경종은 게장을 먹고 평소보다 많은 수라를 들었고, 세제는 생감을 권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경종은 가슴과 배에 통증을 느끼고 위독해졌다. 다음날 세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라 명령하였는데 어의 이공윤은 강하게 반발했다. 세제는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은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 새벽 3시 경종은 세상을 떠났다.

 

연잉군은 어의의 반대에도 게장, 생감, 인삼, 부자를 올리며 독살을 의심받게 되었다. 이러한 의심속에서 연잉군이 즉위하였고 연잉군이 21대 임금 영조이다.

 

 

영조4년(1728), 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 난은 이러한 의혹의 소산이었다. 또한 영조31년(1755) 나주 벽서 사건 때 신치운이 국문을 당하면서 '나는 갑신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는 말을 한것 또한 경종 독살설의 의혹을 보여주는데 신치운은 경종4년 당시에 인원왕후와 연잉군이 공모해 경종을 죽이지 않았냐며 직접 따졌다. 경종의 독살설로 심해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후에 사도세자의 비극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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