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943
송악의 호족 왕융과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 장남으로 태어나 896년 궁예(태봉국 후고구려의 국왕)의 하휘에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후고구려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0년부터 후백제 견훤과 교전하여 903년 전라남도 나주 등지를 점령하였다. 906년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번 싸운 끝에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태봉이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 세력을 위축시키자 그 공로는 완건에게로 돌아갔고, 왕건은 궁예에 이어 태봉국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왕건이 나주에서 한 우물가에 있던 처녀에게 물을 달라하였는데, 처녀가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을 하나 띄워서 주었다고 한다. 물을 빨리 마시고 체할것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처녀는 오다련군의 딸이었고 왕건은 오다련군의 딸 오씨와 결혼을 했다. 아들 무(훗날 혜종)이 태어났지만 왕건은 군대를 끌고 돌아갔다.
궁예와 완건의 활약으로 태봉국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왕건의 지위는 격상되어 913년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을 추종하는 자들이 늘면서 시기하는 자들도 늘었고, 왕건은 궁예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궁예 또한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궁예는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하였는데, 관심법을 근거로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궁예는 왕건에게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을 안다며 그를 역모로 몰았다.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하였고, 왕건은 거짓으로역모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궁예는 웃으며 정직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했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세력들과 모의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918년 그들은 왕건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으나 왕건은 거절하였는데, 그들의 간청과 부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으로 왕위에 오를 결심을 했다.
918년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국호를 고려로 하고 자신의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군장군 환선길은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했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와 내전에 침입하여 왕건에게 칼을 겨누었는데 왕건이 전혀 겁을 먹지 않자 겁을 먹고 도망치다 잡혀 처형당했다.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였고, 고구려세력의 염원이던 북진정책을 내세웠다.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삼아 정책을 펼쳤다.
신라는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는데, 경애왕과 경순왕은 왕건의 방문에 극진히 대접하고 회유했다. 태조 즉위 후 후백제는 태조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했으나,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을 침략하자 왕건이 신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후백제와의 우호는 깨지게 되었다.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키우자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고 왕건은 신라에 군대를 보냈지만 견훤은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까지 진출했다.
927년 견훤은 경주를 기습하여 경애왕 등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고려 원병이 경주로 가던 중 견훤군과 마주쳤는데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왕건은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9월 공산전투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는데, 이때 신승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왕건은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탈출하였다. 신승겸은 견훤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견훤은 모든 경상도 지역에서 승리하였으나 주민의 원한을 사게 되어 당시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순하고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929년 후백제군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왕건은 직접 고창으로 출정했다. 후백제군은 나주도 장악하였고, 고창을 포위하였다. 이떄 고려군의 유금필이 나서서 고창을 버리지 말것을 왕건에게 주장했고, 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의 활약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견훤은 929년 저수봉전투와 930년 고창 병산전투에서 대패하여 삼한 전체의 패권도 상실했다. 935년에는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나주 지역을 탈환해 후백제로부터 당한 피해를 완전히 복구했다. 고창 전투의 대승리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고, 강릉과 울산의 호족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왕건에게 귀순했다. 935년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은 9월 고려에 입국했다. 왕건은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또한 신라의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다.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했다. 이때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와 명주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김순식이 크게 활약했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와 싸워 대패시켰고, 신검군은 마성에서 항복해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 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은 예로서 대접하였다.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교학. 사상. 민간신앙을 보호하였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쳤는데 고려 건국 초기에 정주 류씨, 충주 유씨, 황주 보씨, 경주 김씨, 평산 유씨, 광주 왕씨, 신천 강씨, 평산 박씨, 의성 홍씨 등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였다. 또한 후백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들 역시 후비로 맞이했다.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혼인하고 자신의 딸 낙랑공주 유씨와 서녀 왕씨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친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왕건의 제1왕비는 신혜왕후 류씨로 류천궁의 딸이었다.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던 시절 만났다고 전해진다. 후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정주 땅에서 잠시 휴식하다 시냇가에 있는 류씨를 보게 되었고, 한눈에 반하여 류천궁의 저택에 묵었다. 류천궁은 자신의 딸인 류씨를 왕건과 동침하도록 하였는데, 왕건이 전장으로 떠나자 류씨는 비구니가 되었다. 왕건이 후에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찾아와 혼인을 하였다. 그녀는 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울때 갑옷을 입히고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제2왕비는 장화왕후 오씨로 오다련의 딸이다. 왕건의 장남 왕무를 낳아 고려2대 혜종이 되었다.
제3왕비 신명순성왕후 유씨로 5남2녀를 낳았다. 고려 3대왕 정종과 4대왕 광종의 어머니이다. 고려를 창건한 직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본관이 충주로 당시 충주는 후백제, 신라와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 지역의 호족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호족세력을 포섭했다.
그외에도 수많은 왕비와 후궁들을 맞이해서 29명의 부인이 있었고, 많은 자손들을 보았다.
고려시대에는 족내혼이 가능했기 때문에 왕건의 자손들은 이복남매들과 혼인하는 일이 많았다. 후궁을 제외한 왕건의 왕비들과 후손들의 가계도는 위와 같다. 색으로 된 선은 이복남매들의 혼인을 뜻한다.
왕건은 태자 무를 일찍부터 정윤으로 정했으나 태자 무의 외가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했다. 왕건은 박술희를 불러 고명 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했다. 943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차비 장화왕후 오씨에게서 난 아들 무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혜종이다. 왕건은 제1비 신혜왕후가 묻힌 곳에 함께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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