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3대 왕 정종 왕요와 고려 4대 왕 광종 왕소

GoodFortune 2019. 8. 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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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923-949

재위 945-949

 

광종

925-975

재위 949-975

 

 

정종과 광종은 태조 왕건과 제3왕비 신명순성왕후 사이의 아들이다.

정종은 신명순성왕후의 차남으로 이름은 왕요이고, 광종은 신명순성왕후의 3남으로 이름은 왕소이다. 신명순성왕후는 태조 왕건에게서 태자 태, 왕자 요, 왕자 소 등 3남을 연이어 출산했으나 태자 태는 일찍 요절하였다.

 

달의 연인의 왕소
달의연인의 왕요

 

정종의 왕비는 문공왕후 박씨와 문성왕후 박씨로 박영규와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 견씨 사이의 딸들이다. 광종의 왕비는 태조 왕건의 제4왕비 신정왕후의 딸 대목왕후 황보씨로 이복누이이다.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혜종의 딸이다. 당시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복남매들 사이의 족내혼을 시켰다. 고려시대에는 외가의 성을 따르기도 했는데 대목왕후 황보씨는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의 성을 따랐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였보았으며 945년 태조의 사촌인 왕식렴의 도움으로 박술희를 제거하고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왕규의 난을 진압한 뒤에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왕규의 난은 혜종 지지파였던 왕규와 정종, 광종 지지파였던 왕식렴 세력 간의 정쟁으로 간주되어, 왕규가 역모를 꾸민 일이 반대 세력에서 꾸며낸 일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정종은 왕위에 올랐으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아 정통성 문제로 집권기반이 약하였다. 그는 왕식렴의 주 근거지인 서경으로 천도를 하려 하였는데, 개경의 호졸들과 옛 공신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불안한 정종은 동생 왕소마저 의심하였다.

 

고려 정종 가계도

948년 동부 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후 계속 병석에 있었다. 949년 3월 정종은 동생 왕소를 불러 양위했는데, 아들 경춘군이 있었음에도 왕소의 찬탈을 염려하여 동생인 왕소에게 왕위를 했다고 한다. 정종이 세상을 떠나자 25세의 광종이 즉위하였고 서경 천도 계획은 즉각 백지화되었다.

 

광종은 성격이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신중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정종은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않는 성품인데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 라고 최승로가 평하였다.

 

당시 유력한 호족들,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에게 호의적이었다. 많은 호족 세력을 등에 업고 광종은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광종은 즉위 후 왕실에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는데, 노비안건법은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노비안건법으로 호족의 약화와 왕권 강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958년에는 고려에서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고려 광종 가계도

 

광종의 왕비 대목왕후에게는  2남 3녀가 있었는데 장남 태자 주가고려 5대 왕 경종이 되고, 차남 효화태자는 요절하였다. 딸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이 있는데 셋째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 고려 6대 임금 성종에게 재가한다. (고려시대의 혼인제도는 지금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960년 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옥이 가득차 임시 감옥을 둘 정도였다. 이 시기에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정종의 아들 경춘군과 혜종 아들 흥화군, 태조의 서자인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했다.

광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958년 과거제도로 선발한 인재들과 독자적으로 육성한 친위대인 시위군졸을 통해 궁궐을 장악,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반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 있었다.

 

965년 장자 주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광종은 태자 주 또한 의심하였지만 둘째아들 효화태자가 요절한 관계로 왕위를 물려줄 다른 아들이 없었다. 태자 주는 자신의 뜻을 일체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975년 여름 갑자기 병환이 나서 누웠고, 며칠 안있어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종은 즉위할 당시 신하를 예우하고 정치를 현명하게 처결했으나, 중반 이후로는 사람들을 많이 처형시키고 지나치게 불교를 신봉했으며 사치한 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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