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6대 왕 성종 왕치

GoodFortune 2019. 8. 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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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고려 6대 왕)

960-997

재위 981-997

 

성종 왕치은 태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태조의 제4왕비 신정왕후의 아들 대종, 어머니는 태조의 제6왕비 정덕왕후의 딸 선의왕후였다. 아버니와 어머니 모두 태조의 자식이었다.

969년 아버지 대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선의왕후도 일찍 여의게 되어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 경종의 왕비 헌애왕후는 성종의 여동생인데, 경종 승하 당시 경종과 헌애왕후의 아들 왕송은 2살이었다.

981년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종의 아들 왕송(훗날 목종)이 어리자 조카를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성종은 조카인 왕송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

 

천추태후의 고려 성종

 

즉위 직후 충과 효로 다스리겠다며 유교적 통치를 선언하였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 선경대왕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선의왕후로 추존한 뒤 종묘에 합사하였다. 태조의 기일 전후 5일,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 기일 전후로 3일간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도살을 금하고 경건하게 보냈다.

 

고려 성종 가계도

 

최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 건의로 신정을 단행하고, 국자감에서의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성종2년 2성 6관을 두고, 7시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다. 광종, 성종의 노력으로 문치주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천추태후의 헌애왕후

 

천추태후의 헌정왕후

성종의 두 누이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고종사촌인 헌숙왕후는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광종의 태자 경종의 왕비가 되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헌애왕후는 아들 왕송과 궁궐에 살았고, 헌정왕후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숙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하였고,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자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내고 헌정왕후는 대량원군을 낳다 죽었다. 성종은 대량원군을 데려다 양육하였는데, 그가 고려 8대 왕인 현종이다.

헌애왕후 또한 김치양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종이 죽은후 외가의 친척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치양을 자주 만나다 사통하게 되었는데,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다. (후에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권력남용과 횡포가 심하였고, 1009년 현종이 즉위하자 처형되었다.)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성종의 제2왕비인 문화왕후는 성종의 여동생들의 아들인 목종과 현종을 돌보며 훗날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종 20년에 대비에 봉해졌다.

 

천추태후의 문화왕후

 

복잡한 가계도지만 대략적으로 그려보았다.(생략된 부분 있음)

 

고려 왕조 가계도

 

993년 성종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안주까지 안주까지 나아가서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담판으로 요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했다.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해 영토를 넓혔다.

 

995년 성종14년에는 지방 행정구역을 10도 12주로 나누어 다스렸고, 과거제도를 강화, 장려하였다.

 

성종은 정치, 사회, 문화 제도 전반을 정비하여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997년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 왕송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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