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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사회와 문화

GoodFortune 2019. 9. 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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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끌었던 공화정을 '로마 공화정' 혹은 '로마 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정'의 뜻은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이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균등하게 부담하되,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는 형태였다.

 

공화정 초기, 왕정의 몰락으로 소수 혈통 귀족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왕을 대체한 공화정 초기의 권력 형태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기원전 5세기 중엽쯤 집정관이 고위 정무관직이었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며 2명으을 선출하여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서로에 대해 거부권이 있었다. 원로원(세나투스)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자문 기구였다.

 

로마 원로원

 

로마 공화정 체제는 정무관(마기스트라투스)과 원로원, 평민회 중심이었다. 정무관은 행정과 군대를 관할했다. 원로원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되어 권력의 중심이었다. 평민회는 민주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재판을 담당하고 평민의 대표인 호민관을 선출했다.

 

로마 공화정은 강력한 과두정 지배 체제였다. 원로원은 엄격한 서열 원칙이 있어 토론시 원로원 제1인자가 먼저 견해를 밝힌 후 감찰관, 집정관, 법무관 순으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도록 되어있었다. 서열이 낮은 의원은 자신의 의사도 밝힐 수 없었고, 먼저 발언한 서열 높은 발언자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

 

 

정무관의 임기가 1년이며, 전임 정무관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의사 결정에 의존하여 원로원에서 독립하지 못하였다. 정무관 또한 원로원 내의 실세 집정관 출신들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시민은 귀족인 파트리키와 평민인 플레브스 두 계급이 있었는데, 평민 계급은 기득권층인 귀족 계급의 신분에 반발하여 투쟁을 하였다. 귀족은 평민과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신분 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로마가 주변국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무장 보병을 구성하였던 로마 평민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로마 편민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점차 높아졌다. 평민들은 평민의 대표인 호민관을 선출하고 보조자인 조영관 직책도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구전으로 법이 전해지며 귀족의 전유물이었으나 평민은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여 기원전 B.C. 451년 10인 입법 위원회가 구성되어 로마법의 모체가 된 12표법을 제정했다.

 

B.C. 455년경 귀족과 평민이 통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로마의 지배 계층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B.C. 376년 두 집정관 중 한명은 평민 출신에 할당하도록 하였다. B.C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에서는 트리부스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재가 없이 전체 시민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가지도록 규정하며 신분 투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정 로마 사람들은 일곱 언덕이 있는 로마 시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했다. 극장, 체육관, 술집, 목욕탕도 있었다. 로마의 도시에는 포룸과 신전이 있었고 수도관이 있었다. B.C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 문화가 부상했는데 그리스 조각을 헬리니즘식 경관으로 궁정이나 별장의 정원을 꾸미고, 요리 또한 그리스식이었다.

 

사회의 중심은 가족이었으며 가부장은 가족의 절대적인 우두머리로, 아내, 자녀, 손자와 이들의 아내, 노예, 해방노예 모두에 지배권을 가지고 재산과 목숨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옷을 통해 신분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평민이나 노예는 어두운 색 직물로된 투니카를 입었고, 귀족은 린넨이나 흰 양털로 된 투니카를 입었다. 기사나 정무관은 자주색 장식의 투니카, 원로원은 붉은 줄이 있는 투니카를 입었다. 신발 또한 귀족들은 붉은색, 주황색 샌들을 신고, 원로원은 갈색 신발, 집정관은 하얀 구두를 신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가면 포로 로마노를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들은 거의 대부분 포로 로마노에 자리해 있었다. 로마에 세워진 최초의 사원과 신전들과 로마 공화정 시기의 의회장도 이 곳에 있었다.

 

B.C 7세기경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로마를 세운 전설적인 왕 로물루스부터 이곳은 로마의 중심이었다.

 

로마 포로 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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