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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중기 로마의 포에니 전쟁 - 로마의 지중해 정복과 카르타고의 멸망

GoodFortune 2019. 9. 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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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영토

 

B.C 287년 이후 로마 내부 신분 투쟁이 마무리되었고, 귀족과 평민 출신 원로원 신귀족들이 이후 150여 년간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였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일리리아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시리아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을 정복했다.

 

 

카르타고(보라색)과 로마(빨간색)

 

1차 포에니전쟁 (B.C 264 - 241)

B.C. 264년부터 B.C 241년 카르타고(Carthage)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23년간 지중해 패권을 놓고 전쟁을 하였다. 페니키아의 도시인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연안과 이베리아 반도 일부를 거느리는 거대한 제국이었고, 시칠리아 해협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주변의 해상을 장악하고 지중해 교역로를 관할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와 로마 중간에 위치한 섬이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나머지 동부 쪽은은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메시나를 공격해오자 메시나는 카르타고와 로마에 모두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에도 구원 요청했음을 알고 구원병을 파견했다.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해군력이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

 

카르타고는 해운업이 발달하여 해군이 강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위한 육군이 강했기에 해전 경험이 부족한 로마는 초반에 패배하였다. 로마의 해군 사령관 스키피오가 포로로 잡히고, 그 뒤를 이은 두일리우스는 쿠르부스 라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코르부스를 앞세운 로마 해군은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고카르타고에 상륙했다. 카르타고와의 전투에서 로마 사령관 레굴루스는 포로로 잡혔고 로마군은 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철수 도중 많은 피해를 받았다. 카르타고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전쟁을 벌여 로마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로마군은 투창을 이용해 코끼리부대를 무력화시키며 승리하였다. 이후 해전에서 카르타고가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 B.C 241년 트라파니에서의 대규모 해전에서 대패하며 로마는 승리하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수복을 포기하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한니발 전쟁

 

2차 포에니전쟁 (B.C 218-202)

한니발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포에니전쟁은 B.C 218년부터 B.C 202년까지 로마와 카르타고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1차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는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다. 급료 지불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사이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향력에 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지배권을 얻었다.

 

한니발 이동루트

B.C 219년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경영하던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국인 이베리아 반도 동쪽 해안의 사군툼을 침공했다. 로마는 철수를 요구했으나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B.C 218년 한니발은 보병 4만 명, 기병 8000,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티키누스에서 처음 만났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패하였고, 트레비아강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대패했다. 이후 B.C 217년 에트루리아 지역인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도 패하며 토스카나 지방도 잃었다.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을 임명하고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다니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 전술로 많은 로마인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비판을 받았지만 만회할 시간을 벌었다. B.C 216년 칸나이 평원에서 대규모 회전을 벌였고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는 패하였다. 

 

B.C 215년 시라쿠사와 카푸아가 한니발 편에 돌아섰고 마케도니아도 한니발과 공통 투쟁을 선언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한니발의 강화 제의를 거절하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파비우스 전출 체제로 돌입했다. 이 전술로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 이기지도 지지도 않으며 소모전을 벌였다.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로마가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다. B.C 211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함락했다. 캄파니아 지방의 카푸아도 로마군이 포위하여 탈환하였다.

 

B.C 209년 히스파니아에서는 26세의 젊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의 근거지 신 카르타고를 함락시켰고, 한니발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쫓고 쫓기는 상태였다. 그 사이 타렌툼이 함락되었다.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군을 모아 B.C 207년 북부 이탈리아로 도책했고 한니발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로마군 사령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메타우루스 강둑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쳤고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전사했다. 또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쳤다.

 

B.C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패하며 전쟁이 막을 내렸다. 자마 전투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의 로마군의 전투로 스키피오가 승리하며 한니발은 패하였다. 카르타고는 심한 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몰아주며 지중해 서부의 이권을 로마에게 빼앗겼다.

 

 

 

 

제3차 포에니전쟁 (B.C 149-146)

제2차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는 점차 동쪽으로 마케도니아 왕국, 일리리아, 시리아로 영역을 확대했고, 히파니아의 반란을 진압했다. 카르타고는 B.C 156년 이후 5년만에 전쟁의 상처를 없애고 국력을 회복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국력을 약하게 만들고 자신이 침입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누미디아로 하여 카르타고의 선박과 영토를 약탈하라는 제안을 한다. 누미디아는 주기적으로 카르타고 영토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고,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영토 문쟁은 로마 원로원의 중재를 받아야 한다는 조약으로 누미디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로마가 개입을 하게 된다. 누미디아의 침입이 2년 가까이 계속 되며 카르타고의 손실이 컸다. 카르타고는 용병을 조직하여 누미디아 영토로 진입했다. 로마는 조약위반으로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카르타고에서는 로마와의 전면전에 대해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장수를 처형하고 로마에 사죄하기 위한 사절단을 보냈으나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첫번째 조건으로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 넘길것을 제안하였다. 10만이 넘는 무기를 로마에 넘겨주었는데 로마는 두번째 조건에서 수도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주민은 해안에서 15km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참을 수 없던 카르타고는 로마에 결전을 준비했다. 무기를 모두 로마에 보낸 카르타고는 돌, 나뭇가지, 맨손으로 맞섰고 로마군의 무기를 뺴앗아 대항하였는데 이 전쟁은 3년동안이나 이어졌다. 당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카르타고 함락 이후 도시를 무자비하고 철저히 파괴하여 볼모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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