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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6세)

GoodFortune 2022. 9. 1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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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 헨리 5세 - 헨리 6세

 

랭커스터 왕조는 1362년 곤트의 존에 의해 시작되어 1472년 헨리 6세가 마지막 왕이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 에드워드 3세의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시조가 된다. 에드워드 3세의 장손자 리처드 2세(1377.6.22~1399.9.30)가 즉위했지만 어렸기에 작은아버지인 곤트의 존(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 실권을 쥐었다. 리처드 2세가 성인이 되고 친정을 시작한 후 1386년 존의 아들 헨리 볼링브록은 정계에 입문해 리처드 2세와 적대하기 시작했다. 1399년 곤트의 존이 사망하고 랭커스터 공작령을 몰수당하자 헨리는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헨리 4세로 즉위하며 랭커스터 왕조의 첫 왕이 된다.

 

곤트의 존 가계도

헨리 4세

1366.4.3~1413.3.20 재위 1399.9.30~1413.3.20

 

랭커스터 왕조의 첫번째 왕이다.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블랜치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곤트의 곤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볼링브록의 재산을 빼앗았다.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방문을 한 사이 헨리 볼링브록은 잉글랜드를 침략해 리처드 2세를 몰아낸다.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자신이 헨리 3세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 찬탈을 정당화했다.

리처드 2세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왕이 됐기 때문에 몇몇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헨리 5세

1386.9.16~1422.8.31 재위 1413.3.21~1422.8.31

 

헨리 4세가 병에 들었을 때 아버지 대신 국왕 자문회의를 운영했던 유능한 왕세자였다. 아들이 너무 유능하자 병에서 회복한 헨리 4세는 아들을 견재해 헨리 5세에게 아무런 공직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헨리 5세는 키가 약 190cm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거구였다.

즉위했을 당시 프랑스와 백년전쟁 시기였다. 왕위에 있는 동안 대부분을 프랑스군과 싸우며 지냈다고 할 수 있다. 1415년 10월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과 아르마낙파가 주도하는 프랑스군이 충돌하며 아쟁쿠르 전투가 발발했고 헨리 5세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아쟁쿠르에서 헨리가 포로 할살을 지시하였는데 굉장히 잔혹한 처형을 시켰다고 알려져있다. 헨리 5세는 프랑스로 원정을 재개하며 프랑스군을 공격했는데 항복을 거부하면 시민들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1418년에는 파리까지 탈취하였는데 당시 샤틀 6세는 정신병이 너무 심한 상태였고 유일한 아들 도팽 샤를은 파리를 떠나 도피했다.

헨리 5세는 샤틀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면서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의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왕국의 왕이 되지 못한채 젊은 나이에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였다. 헨리 6세는 어린 아기였고 샤를 6세도 살아있자 프랑스에서는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도팽 샤를은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하였다. (이후 이야기는 아래 헨리 6세에서 이어간다.)

 

헨리 6세

1421.12.6~1471.5.21 재위 1422.8.31~1461.3.4 1470.10.3~1471.4.11

프랑스 1422.10.21~1453.10.19

 

헨리 6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왕 샤를6세의 딸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6세가 태어나자마자 헨리 5세가 죽으며 생후 9개월에 왕위에 올랐다. 또한 2개월 후 샤를 6세가 정신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트루어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성년이 될때까지 숙부인 베드포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섭정하게 되었다.

몇 년 후 17살 잔 다르크가 등장하며 프랑스의 국왕 자리가 위태로워지는데, 잔 다르크는 아일랜드군을 무찌르며 프랑스 왕이 대관식을 할 수 있는 랭스를 차지하였고, 헨리 6세의 외숙부 샤를 7세가 트루아 조약의 비적법성을 주장하며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베드포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 그리고 윈체스터 추기경은 잔 다르크를 붙잡아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 이단자로 몰아서 화형대로 보내고 말았다.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후 헨리 6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지만 정식 장소인 랭스가 아니었기에 파리 국민들에게 반발만 샀다. 베드포드 공작이 죽고 글로스터 공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게 되며 헨리 6세도 힘이 약해졌고 프랑스인들의 반잉글랜드 감정은 커졌다. 동맹을 맺었던 부르고뉴파는 프랑스 편에 붙어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바치는 바람에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의 잉글랜드령을 모두 잃게 된다. 

먼 친척인 요크 공 리처드의 아들이자 8촌 동생인 에드워드 4세에게 밀려 런던 탑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몇년 후 에드워드 4세를 밀어내고 왕좌에 다시 오르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하여 다시 에드워드 4세에게 밀려났다. 그리고 1471년 에드워드 4세와 추종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랭커스터 왕조와 튜더 왕조의 관계

발루아의 카트린(캐서린)은 헨리 5세 사망 후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다. 에드먼드 튜더는 곤트의 존이 3번째 부인이자 정부 캐서린 스윈포드의 증손녀인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해 헨리 튜더를 낳았는데 그가 훗날 튜더 왕조의 첫 번째 왕 헨리 7세이다.

 

에드워드 4세를 이어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이었다. 에드워드 5세의 숙부이자 섭정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하였는데, 분열된 요크 지지자들과 떨어진 민심을 포착해 2년 만에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고 에드워드 4세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헨리 7세가 튜더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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