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 - (청년왕 헨리) - 리처드 1세 - 존 왕 - 헨리 3세 - 에드워드 1세 - 에드워드 2세 - 에드워드 3세 - 리처드 2세
헨리 1세의 후계자는 딸 마틸다가 있었다. 그러나 봉건 영주들은 마틸다를 인정하지 않았고 헨리1세의 외조카인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두고 내전이 일었다. 스티븐이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후계가 없자 마틸다의 장남 헨리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가 헨리 2세이며 플랜태저넷 왕가가 시작된다. 플랜태저넷 왕조는 331년동안 이어졌다.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헨리 2세부터 존 왕까지는 앙주 왕조, 헨리 3세부터 플랜태저넷으로 부르기도 한다.
헨리2세
1133.3.5~1189.7.6
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이며 어머니는 헨리1세의 딸 마틸다이다. 헨리 1세의 외조카 스티븐 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헨리 2세는 19살에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였다. 결혼 전부터 정부가 있었기에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 존 왕 등 5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헨리 2세가 나이 많은 엘레오노르와 혼인한 이유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영토를 가지기 위해서였는데 헨리 2세는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쳐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 또한 자녀들이 유럽 왕가와 혼인하여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까지 획득했다. 헨리 2세는 2남인 청년왕 헨리에게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3남인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4남인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존에게 상속할 영지 확보를 위해 아일랜드를 침공해 영지를 획득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청년왕 헨리아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고 왕위에만 앉혀두었기에 부자간의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를 꾀어 아머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유도했는데, 부인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와 제프리까지 부추겨 아버지에게 반란을 하도록 부추겼다.
헨리 2세는 노르망디를 향해 오는 세 아들을 모두 격피하고 항복시켰다. 엘레오노르는 이 반란으로 감금당했다가 헨리 2세가 사망한 후 풀려나게 된다. (아들 존만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켰다.)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는 병으로 사망하고, 리처드 1세는 아키텐 땅을 두고 헨리 2세와 다시 한번 부딪히게 된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고, 리처드는 아키텐의 지배권을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등득하고자 했다.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 존까지 리처드 편에 서게 되며 헨리 2세는 건강악화로 사망하게 된다.
34년 재위 중 잉글랜드에 머무른건 14년 정도였다.
청년왕 헨리
1155.2.28~1183.6.11 재위 1170~1183.6.11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차남으로 태어난 헨리는 5살에 프랑스 루이 7세의 2살 된 마르가리트 공주와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헨리2세와 루이 7세의 지배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는데, 헨리의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전남편이 루이 7세이다. 마르가리트는 루이 7세의 두번째 왕비의 딸이다. 어쨋든 이혼한 부부가 자신의 두번째 배우자의 자식들과 결혼을 시킨 것이다.
15살이 되던 해애 잉글랜드 왕국의 공동왕(아버지 헨리2세와 공동왕이었다)으로 즉위하였다. 당시는 공동왕 제도를 활용해 후사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제도로 프랑스 카페 왕조에서도 있었다.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헨리를 청년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동왕에 올랐으나 아버지 헨리 2세는 아들에게 별다른 권한을 주지 않았고, 프랑스 왕의 부추김이 더해져 1173년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어머니 엘레오노르와 동생 제프리, 리처드까지 반란에 참여하였으나 헨리 2세에게 패하고 만다.
청년왕 헨리는 1182년 동생 제프리와 아키텐을 진격하여 동생 리처드를 공격하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1183년 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반란이 중단되었다.
리처드 1세
1157.9.8~1199.4.6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삼남으로 13세에 루이 7세의 차녀 아델과 약혼한다.(형의 부인인 마르가리트 공주의 동생이다) 16세에 아키텐 공작으로 올랐으며 헨리2세에게 아키텐을 상속 받기로 약속했다. 1173년 청년왕 헨리와 함께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183년 청년왕 헨리가 2차 반란을 하고 아키텐을 공격했을 시기에는 아버지 헨리 2세와 같은 편에 섰다.
이후 헨리 2세는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하는데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인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고, 아키텐은 막내 존에게 상속하겠다고 했다. 리처드는 이에 분노하여 존, 제프리, 리처드 삼형제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헨리 2세가 제프리를 노르망디 관리로 파견하며 리처드와 제프리는 더욱 악화되던 중 제프리 2세가 돌연사하여 리처드에게 기회가 찾아온 듯 보였다.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하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아버지 헨리 2세에 맞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고 잉글랜드 왕국의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관식 날에는 유대인들을 붙잡고 내쫓아 옷을 벗기는 등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해 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야전 사령관으로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를 상태로 전승 무패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고 이슬람인들에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1192년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장녀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정략결혼하였는데, 리처드는 아내에게 무관심했다고 하며 1195년 이후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당연히 적자를 낳지 못하였다. (약혼녀였던 프랑스 공주 아델은 예비 시아버지인 헨리 2세와 간음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의혹이 있다. 언제 리처드와 파혼했는지는...?)
잉글랜드 왕위를 받았지만 10년 재위 동안 잉글랜드에 있었던 시간은 6개월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아키텐(프랑스 지역)에서 지냈다. 잉글랜드 국왕보다는 앙주 제국의 군주로 기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존 왕
1166.12.24~1216.10.19 재위 1199.4.6~1216.10.19
헨리 2세의 막내 아들로 헨리 2세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어린시절 약속받은 영토가 없어 '결지왕(Jonh Lackland)' 이라는 별명이 있지만 헨리 2세는 존에게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애를 썼다. 1199년 형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넷째 형 제프리 2세의 아들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처음에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의 뇌물, 영지, 왕세자 루이의 결혼 지참금 등을 받고 존을 지지하여 존이 즉위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후 첫번째 부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어린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했다. 앙굴렘의 이사벨은 뤼지냥의 위기 9세와 약혼했었는데, 뤼지냥 가문에서 존 왕에게 반기를 들고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존 왕은 프랑스 법정에 소환했는데 존 왕이 대응하지 않자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령 프랑스 영지를 몰수하고 제프리 2세의 아들 아서에게 내렸다. 이에 반발하여 존 왕은 아서를 포로로 잡고, 앙주 영주를 무시하고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지하감옥에 가두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들었다.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하나씩 공략하여 존 왕은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게 된다.
이후 존 왕은 프랑스령을 다시 침공하였으나 세금만 낭비하고 대패하였다. 분노한 귀족들은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하여 존 왕을 폐위시키고 프랑스 왕세자 루이 8세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루이 8세는 아버지 필리프 2세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군을 이끌고 런던을 침공하여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오르려 하였으나, 존 왕이 급서하면서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헨리 3세
1207.10.1~1272.11.16 재위 1216.10.28~1272.11.16
존 왕과 앙굴렘의 이사벨 사이의 아들이다. 아버지 존 왕이 사망한 후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프로방스 백작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처가 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귀족들의 불만이 많았다.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귀족들이 결집하여 반란이 터졌다. 반란군에 맞써 싸웠으나 루이스 전투에서 패하여 동생 콘월 공, 장남 에드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히게 되며 꼭두각시 왕가로 전락하게 된다.
다음해 장남 에드워드가 탈출하여 지지하는 귀족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며 시몽 드 몽포르를 전투에서 물리치며 권력을 회복하였다.
에드워드 1세
1239.6.17~1307.7.7 재위 1272.11.20~1307.7.7
존 왕의 손자이자 헨리 3세의 장남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창설하여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힌다. 헨리 3세 때는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여 국력이 쇠약해져있던 시기였는데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부터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헨리 3세를 도왔다. 이브샴 전투에서 승리하며 왕세자임에도 헨리 3세보다 더 큰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쥐었다. 1271년에는 제 8차 십자군 전쟁에도 참전하였는데, 프랑스 루이 9세가 죽자 휴전이 되었다. 그러던 중 헨리 3세가 병사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올랐다.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발리올(스코틀랜드 국왕)을 잡아 폐위시킨 후 런던탑에 가두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한다. 스코틀랜드는 1328년 에드워드 3세 때 스코틀랜드 독립을 인정받기 전까지 왕 없이 식민지로 지내게 되었다(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를 증오했다)
첫번째 아내 레오노르는 4남 12녀의 아이를 낳았는데 전쟁터에 남편을 따라나설 정도로 충실한 아내였다. 레오노르는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고, 16명의 자녀 중 5명만 성인까지 살아남았다. 두번째 아내는 프랑스 필리프 3세의 딸 마르그리트였는데 그녀는 에드먼드를 낳았다. 에드먼드의 딸이 훗날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결혼한 켄트의 조앤이다.
키카 188cm 로 컸기에 꺽다리 에드워드(Edward Longshanks)라는 별명과 스코틀랜드를 격파하여 윌리엄 웰레스를 죽였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는 별명이 있다.
에드워드 2세
1284.4.25~1327.9.21 재위 1307.7.8~1327.1.20
에드워드 1세와 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5번째 아들이다. 앞서 태어난 4명의 아들이 어린나이에 죽고 에드워드 2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왕자시절 프랑스 피에르 가베스턴에게 퐁티뉴의 땅을 내려줄 것을 아버지에게 요청하였는데, 분노하여 그의 머리채를 잡아 손찌검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에드워드 2세는 가베스턴을 콘월 백작으로 임명하였는데, 지나치게 총애하여 동성연인 설이 돌기도 했다. 가베스턴은 콘월 백작이 되자마자 국왕의 자문을 독점하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1310년 사촌인 랭커스터 2대 백작 토머스 플랜태저넷 등의 귀족들이 에드워드 2세가 향락에만 빠져 정책 결정도 가베스턴의 말만 듣고 결정하면서 실정을 저지르는 것에 불만을 갖고 의회를 개최하여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에드워드 2세가 새로운 법령을 따르지 않자 분노한 귀족들은 1312년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가베스턴은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반역죄로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과 의회에 원한을 품게 된다.
1314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하자 군대를 끌고 스코틀랜드로 갔지만, 대패하고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된다.
1322년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 전횡을 일삼던 휴 데스펜더는 귀족들의 반발을 사고, 왕비 이사벨과 왕세자 에드워드 3세의 영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왕비 이사벨은 프랑스 필리프 4세의 딸이자 루이10세, 필리프5세 샤를 4세의 누이이다) 왕비 이사벨은 귀족들과 1327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를 개최하여 에드워드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세자 에드워드를 즉위시켰다.
에드워드 3세
1312.11.13~1377.6.21 재위 1327.2.1~1377.6.21
에드워드 2세와 이사벨의 장남으로 조부는 에드워드 1세이며 외조부는 프랑스 카페 왕조 필리프 4세이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성인이 되기 전이라 어머니 이사벨이 섭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정리를 위해 에든버러 조약을 제결하며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고 잉글랜드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고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살리카법으로 모계 계승은 인정받지 못해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에게 밀렸다.(에드워드 3세의 외조부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이다.)
말년에 정부 앨리스 페러즈에게 빠져 지냈는데 앨리스 페러즈는 에드워드 3세의 아이를 세명이나 낳았고, 왕비 에노의 필리파가 먼저 사망하면서 앨리스는 왕비와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에드워드 3세가 어마어마한 보석을 퍼부어 그녀는 56개의 장원과 성을 소유할 정도로 부자가 되었으나 에드워드 3세의 병세가 깊어지며 권력을 상실했고 토지를 몰수당한 후 추방당했다.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는 한해 먼저 사망하게 되며 손자인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른다.
리처드 2세
1367.1.6~1400.2.14 재위 1377.6.22~1399.9.30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2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켄트의 조앤의 차남이다. 형이던 앙굴렘의 에드워드가 요절하면서 외아들인 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즉위 초반 의회와 견제세력들을 누르고 왕권 강화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서퍽 백작 마이클과 옥스포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등 총신들 중심의 정치를 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귀족들이 중심인 의회가 이런 통치에 반발하게 되었다. 의회는 서퍽 백작 마이클을 탄핵하고 11인 의원회를 개설해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리처드 2세는 왕권의 도전으로 천명하고 의회파들을 제거하였는데, 의회파의 우두머리 중 한명인 숙부 글러스터 공작 우드스톡이 앞장서 리처드 2세를 위협한다. 의회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옥스포드 백작을 격파하자 리처드 2세는 의회에 굴복하고 만다. 리처드 2세는 사병들을 기르고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의회에 반격하여 복수에 성공한다. 1399년 숙부인 곤트의 존이 죽자 그의 아들 헨리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였는데, 이후 아일랜드를 방문한 틈을 타 헨리가 주도하는 반란군이 잉글랜드로 침공하여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헨리에게 항복하고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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