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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1세 찰스1세 찰스2세 제임스2세 메리2세 윌리엄3세 앤 여왕)

GoodFortune 2022. 9. 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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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1세 - 찰스1세 - 잉글랜드 연방 - 찰스2세 - 제임스 2세 - 메리2세&윌리엄3세 - 앤 여왕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첫 통합 왕국 시대를 열었다.

1603년 제임스 1세부터 1714년 앤 여왕의 사망까지 110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공통 통치했다.

사회 변화 속도가 빠르고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심각했다. 정치적 극단주의를 겪으면서 청교도 혁명으로 나라가 둘로 갈려 내전을 치루기도 했다. 

 

제임스 1세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1567.7.24~1625.3.27 재위 1603.3.24~1625.3.27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잉글랜드 메리 1세와 다른 인물이다)과 헨리 스튜어트는 정략적으로 결혼하였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메리 여왕이 아들 제임스를 낳았지만 헨리 스튜어트는 메리 여왕의 정부 다비드 리치오를 죽였다. 이에 메리 여왕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짜고 헨리 스튜어트를 죽인 후 그와 재혼했다. 이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시켰고, 제임스는 1살의 어린나이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당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튜더 왕조가 끝이 나자 헨리 7세의 후손이었던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며 제음시 1세로 즉위한다.

제임스의 어머니 메리여왕은 헨리 7세의 딸 마거릿의 첫번째 남편 제임스 4세 사이의 손녀이며, 아버지 단리 경은 마거릿의 두번째 남편 아치볼드 더글러스 사이의 손자이기에, 제임스는 부계 모계 양쪽 모두 잉글랜드의 혈통을 지닌다.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다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로 불린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을 연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통일했다.

왕비인 덴마크 국왕의 차녀 앤과는 1589년 결혼했으나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아나와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찰스 1세 뿐이다. 

제임스 1세 가계도

찰스 1세

1600.11.19~1649.1.30 재위 1625.3.27~1649.1.30

 

찰스1세는 제임스1세와 앤의 차남으로 형 헨리가 먼저 사망하게 되어 제임스1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앙심이 돈독하여 궁정 내의 저속한 분위기가 없었다고 한다.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트 마리와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초기에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나 왕비의 반대파가 실각한 후에는 부부 사이가 좋아졌다.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강력한 왕조가 아니었기에 잉글랜드에서 왕위를 얻기는 했지만 세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으로 의회파 크롬웰에게 죽임을 당한다. 찰스 1세는 신민들 앞에 사형수로 섰고 마지막 연설 후에 참수되었다. 그는 마지막 연설에서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영국은 한동안 왕이 없는 국가,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자가 되어 거의 왕과 같이 권세를 누렸다.

 

찰스1세의 장남 찰스 제임스는 태어난 다음날 사망했기에 찰스 2세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장녀 메리의 아들 윌리엄은 후세 윌리엄 3세가 된다. 또한 차남 제임스는 찰스2세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를 이어 받았다.

스튜어트 왕조 가계도

 

찰스 2세

1630.5.29~1685.2.6 재위 1660.5.29~1685.2.6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잉글랜드가 위험해지자 어머니 앙리에뜨 마리와 동생들과 함께 164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1649년 크롬웰의 혁명에 반대하던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크롬웰이 스코틀랜드까지 쳐들어와서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잉글랜드 연방 공화정 정부가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1660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크롬웰 독재에 질린 백성들은 찰스2세가 귀국하자 모두 환호했다.

찰스2세는 아버지인 찰스1세 처형 12주년을 맞아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하여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복수를 하였다.

재위 중 2차 3차 영란전쟁(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의 전쟁)에서 모두 대패하였으나, 국내 정책에서는 귀족과 협력하여 안정된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포르투갈 주앙 4세의 3녀인 카타리나(영어식 : 캐서린)와 정략결혼하였으나 왕비에게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카타리나는 3차례 아이를 유산한 후 더이상 임신을 하지 못했다.

찰스 2세는 역대 잉글랜드 국왕 중 손꼽히는 호색한으로 정부가 10명이 넘었으며 8남 5녀를 모두 사생아로 두었다.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 제임스 7세)

1633.10.14~1701.9.16 재위 1685.2.6~1688.12.11

 

형 찰스 2세에게 아들이 없었기에(서자만 있었다)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제임스 2세는 종교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가톨릭 신도였던 그는 가톨릭의 합법화를 원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으로의 회귀가 아닌 모든 종파를 위한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내놓았으나 신하들은 극렬 반발했다. 두 딸 메리와 앤은 개신교를 믿었고 남편들도 모두 개신교 신도들이었으나, 제임스 2세가 뒤늦게 아들을 낳자 신하들은 가톨릭 왕조가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개신교 의원 7명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 '오라녜의 빌렘(윌리엄)'에게 제임스를 축출할 것을 요청하였고, 1688년 윌리엄은 그의 군대를 잉글랜드로 보내 제임스 2세를 밀어내고 메리와 함께 공동왕위에 올랐다. 이후 제임스 2세는 재기하지 못한채 결국 프랑스에서 여생을 마쳤다.

제임스 2세의 첫 부인 앤은 8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남편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다. 8명의 아이 중 메리와 앤을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요절했고, 두 딸은 여왕이 되었다.

두번째 부인 메리는 25살이나 나이 많은 제임스 공작과(즉위 전) 결혼했다. 장녀 메리와는 4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메리는 결혼 후 7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성인까지 자란 이는 늦둥이 아들 제임스 뿐이었다.

제임스 2세의 늦둥이 아들 제임스는 메리와 앤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1701년 왕위를 요구했고, 제임스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 찰스가 왕위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리 2세 1662.4.30~1694.12.28 재위 1689.2.13~1694.12.28

윌리엄 3세 1650.11.4~1702.3.8 재위 1692.13~1702.3.8

메리 2세는 제임스 2세의 장녀로 부모가 가톨릭교로 개종한 것과 달리 개신교를 믿었다. 네덜란드 오라녜 공 빌렘(윌리엄3세)와 결혼하여 아버지인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메리 2세는 재위 5년만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남편 윌리엄이 단독으로 1702년까지 재위하였다.

윌리엄3세는 루이14세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 참가했다. 루이 14세는 재정상 어려움을 호소하며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맺고, 윌리엄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의 자녀들은 일찍 사망하여 윌리엄이 사망한 후에는 메리의 동생 앤에게 왕위가 승계되었다.

 

앤 여왕

1665.2.6~1714.8.1 재위 1702.3.8~1707.5.1

제임스 2세의 차녀인 앤은 윌리엄 3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이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을 통합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성립하였다. 1708년 남편 사망 후 건강이 악화되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손이 없어 스튜어트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게 되었고,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공주의 아들인 하노버 선제후국의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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