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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어떻게 재위 3년만에 세상을 떠났을까.

문종 2년(1452) 5월 3일 어의가 문종의 허리 위에 종기가 났다고 알려주어 대신들은 문종에게 잠시 정사를 쉬라고 권유했다. 종기에는 안정이 제일이므로 잠시 국사를 놓고, 둘째 동생 안평대군을 대자암에 보내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5월 5일 문종의 환후를 살피는 당대 최고의 명의 전순의는 종기난 곳에 농즙이 흘러나왔고 콩죽을 드셨으니 괜찮다 하였고, 전순의의 진단을 믿었다. 단종실록에서는 전순의에 대해 "계통이 본래 용렬하고 천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전순의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 22년 6월 금성대군의 병을 낳게 하는데 일조했던 일로 나온다. 전순의를 신뢰한 세종은 그에게 일본의 의술을 배울 기회도 제공했고, 조선 제일의 명의로 자리잡았다. 세종 27년에는 내의원의 대표 어의가..

한명회와 그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부는 한상질로 조선 개국공신이며, 부친은 한기이다. 한명회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는데 번번히 낙방하자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2) 음보 경덕궁직을 얻었다.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고, 수양대군에게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한명회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고, 일찍 죽었다. 한명회의 네 딸들은 모두 좋은 집안으로 출가하는데 첫째 딸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시켜 왕실과 인연을 맺었고 둘째 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을 ..

사도세자 장조왕비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 그리고 한중록의 작자로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을 방조하여 냉혹하다는 평과, 정조와 같이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좋은 어머니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갖고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그런 남편을 견디면서 아들을 잘 키워낸 것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반대의견으로는 한중록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1년 한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봉한, 어머니는 이씨 부인이다.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는 당대 노록을 대표하던 명문 가문이었다. 노론이라는 가문 배경은 홍씨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노론은 서인에서 파생된 당파로, 선조 대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

선조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폐위와 인조반정

인목왕후 김씨는 조선 3대 궁중문학의 하나인 계축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계축일기는 서궁에 갇힌 인목왕후 김씨가 광해군에게 갖은 핍박과 설움을 받다가 인조반정으로 해방을 맞는 과정을 그렸다. 친정아버지, 동생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 영창대군까지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계축일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인목왕후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감상적이고 강직하기보다는 유약한 인물이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부인인 왕비에게 죽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목왕후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성품이 유약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되어있다. 부인인 노씨 부인은 선조 17년에 인목왕후 김씨를 낳았고, 김제남은 당시 10년이 넘도록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한씨

인수대비는 추존왕 덕종의 왕비로 소혜왕후라고도 하지만 인수대비로 더 유명하다. 인수대비는 덕종 도원군의 아내이자 월산대군과 자을산군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이다.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쫓아내 죽음에 이르게 한 매정한 대비로 기억되고 있는데 이 일로 손자 연산군에게 행패를 당해 불행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대비로 지내며 '내훈'을 썼는데 여성들을 유교 윤리로 옭아맨 주범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인수대비를 둘러싼 가계도는 아래 그림과 같다. 수양대군의 큰며느리였던 인수대비 한씨는 계유정난을 겪으며 세자빈이 되었고, 세조 대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에 이르는 4대에 걸쳐 등장한다. 청주 한씨는 당대의 명문이었다. 아버지인 한확은 3남 2녀중 장남이었는데 인물이 뛰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첫째 ..

세조 왕비 정희왕후 윤씨와 계유정난

정희왕후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왕비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행한 대왕대비였다. 정희왕후의 집안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친정아버지는 윤번은 고려 우왕 10년에 출생하였고 부인 이씨와의 사이아 3남 7녀를 두었다. 정희왕후는 아홉째였다. 파평 윤씨 집안은 여직족을 몰아내고 9성을 개척한 윤관 장군 이래로 고려의 명문거족이었고, 조선 건국시 윤호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로로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사위 17명 중 4명을 파평 윤씨 가문에서 맞았다. 윤번은 음서로 벼슬길에 나아갔지만,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음서는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조성 덕에 벼슬을 하는 것이므로 이것만으로는 주류로 행세하기 힘들었다. 윤번은 태종 때 직무를 태만히 하여 태 50대를 맞고 원래..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와 왕자의 난

원경왕후 민씨는 조선의 3대 임금 태종(태조의 5남)의 왕비이다. 조선시대에는 부계가 중요했지만, 고려 말에는 모계도 중요했었다. 민씨의 외가는 친가보다 더 대단했던 가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씨 외할아버지 송선은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주자였던 임유무를 처단하고 무신정권을 끝냈던 송송례의 증손자이다. 무신정권이 끝난 후, 고려 왕(충렬왕)이 원나리 황제의 사위가 되어 고려는 부마국이 되었다. 그러나 충렬왕과 충선왕이 왕위를 놓고 다툼을 벌일 때 송씨 가문은 철저히 충렬왕 편을 들었고, 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며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은 원나라와 관계가 두터웠는데 기황후의 증조할아버지인 기홍영의 사위가 송송례의 송염이었다. (관계..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의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왕비로서, 사실상 조선의 제1대 왕비였다. 그럼에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기록은 한 줄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태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첩으로 간주하고 신덕왕후를 왕비로 인정하는 모든 기록과 기념물을 왜곡하고 없앴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고, 신덕왕후의 능을 파서 도성 밖으로 옮겼다. 선조 때의 일이나 강순일이라는 자가 선조가 탄 수레앞으로 뛰어들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강순일은 스스로를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아버지 강윤성의 후손이라 소개하고 자신이 강윤성의 무덤을 돌보고 있는데 억울하게 군역이 부과되었으니 취소해달라 호소하였다. 이 일로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의 왕비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신덕왕후 강..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영조 (조선 21대 임금) 1694-1776 재위 1724-1776 사도세자 1735-1762 정조 (조선 22대 임금) 1752-1800 재위 1776-1800 영조는 숙종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왕비 처소에 있던 무수리였는데 숙종의 눈이 띄어 아이를 갖게 되었고 숙빈이 되었다. 1699년 연잉군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하여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의 종질녀로 숙종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여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경종(숙종의 장자)이 후사가 없자 경종 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 경종 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2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세제 책봉시에 경종에게 후사가 없고,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자 삼는 일이 급하였는데 ..

숙종의 왕비들과 장희빈

숙종 (조선 19대 임금) 1661-1720 재위 1674-1720 경종 (조선 20대 임금) 1688-1724 재위 1720-1724 현종(조선 18대 임금)의 큰 아들인 숙종은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였다. 숙종 6년에 경신환국, 15년에 기사환국,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 서인 사이에 정권이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허적은 현종 말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현종이 승하할 때 그의 유언을 받들어 숙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영의정을 지내면서 서인들을 조정에서 쫓아냈고 자신이 속한 남인들의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며 단서를 얻기 위해 자기의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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