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과 연개소문 가계도 고구려의 멸망

GoodFortune 2019. 9. 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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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8대 왕 보장왕(642-668)은 평원왕의 손자이자 고대양의 아들이다. 연개소문이 27대 왕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보장왕 가계도

 

642년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빼앗겼다.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거절하였다. 643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고,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당 태종은 신라의 손을 잡았다. 644년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협공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하였고 고구려는 당나라 요구를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은 돌궐군과 거란군을 동원하여 30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 태종은 이세적을 선봉 장수로 세워 고구려의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10개 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고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고구려와 말갈 병사 15만을 끌고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군신관계를 맺기 위해 왔다고 말하며 신하의 예를 갖춘다면 뺴앗은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회유하자 고연수는 안심하였고 이 때 당 태종은 기습공격을 하여 혼란에 빠졌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와 함께 당에 투항하였다. 안시성은 고립되었고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총공격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뛰어난 용병술로 안시성을 지켰고,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안시성 양만춘

 

당 태종은 몇차례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49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으며 고구려와 당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고구려는 신라와 전쟁을 계속하였고 태종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자 655년 당나라는 정명진과 소정방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으나 고구려에 패하였다. 658년 정명진과 설인귀에게 군사를 주어 공격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60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했고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62년 고구려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왜(일본)은 장군을 보내 옛 백제 지역의 소유성에 병력을 주둔시키자 당은 고구려와 신라는 침략하지 못하였다.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 신라는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고, 고구려는 이 시기에 서쪽 변방의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연개소문

 

660년 당나라의 소정방이 10만 대군을 끌고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방전을 벌였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로 밀려왔다. 연개소문은 장남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을 지키도록 했으나 패하였다. 622년 방효태가 이끈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전투에서 패하여 몰살되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많은 손실을 입었다. 또한 연개소문이 666년 죽자 아들들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고 연남생을 제거하려하였는데 이에 연남생은 당나라로 탈출하여 투항하였다. 666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고정을 재편하였으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고구려의 성 12개를 가지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668년 평양성도 함락되었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당으로 끌려가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보장왕은 당에 머무르며 고구려의 재건을 위해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다 발각되어 681년 공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사망했다.

 

 

 

 

보덕왕(고안승 혹은 연안승)은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자이다. 보덕왕의 출신은 <삼국사기>에는 보장왕의 서자라 기록되고 신라본기에는 보장왕의 서자 또는 연정토의 아들이라 기록되었고 <자치통감>에는 보장왕의 외손이라 기록되었다. 고구려 멸망시 안승은 사야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670년 검모잠이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켰다. 신라 문무왕은 그들을 금마저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당군의 압박을 받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로 투항한 안승은 문무왕으로부터 고구려왕에 봉해졌다가 보덕왕에 봉해졌다. 679년에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평정하고 나당전쟁에 참전하였다. 문무왕은 보덕왕 안승을 조카딸과 혼인시켰다. 보덕왕 안승은 보덕국과 격리되어 신라 중앙 귀족이 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안승의 조카 대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에 진압되었다.

 

보장왕은 5남을 두었는데 손자 고보원과 4남 고덕무는 소고구려의 왕인 보덕왕, 덕무왕이 된다.

보장왕의 후손들은 보장왕과 당나라에 끌려가 생활했다. 당은 보장왕을 안동도독에 파견해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으나 효과가 없자 685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보원왕)을 소고구려국왕으로 삼아 고구려로 보내 항쟁을 잠재우려했다. 고구려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하자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당은 669년 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를 안동도독부 도독에 임명하였다. 고덕무는 덕무왕 칭호를 받았고 소고구려는 고덕무 사후에도 백 년 이상 유지되었고 820년 경 발해에 흡수되었다.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아들로 고구려 멸망시 당에 투항하여 당의 관직을 받은 연남생의 아버지다. 영류왕 시대에 천리장성을 쌓을 때 연태조가 죽자 연개소문이 아버지를 이어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였는데, 연개소문은 지략과 재주가 뛰어났고 20대의 젊고 혈기왕성하여 당시 집권층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다. 영류왕은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며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해왔고, 고구려의 무장 세력들은 이런 영류왕의 정책에 반발했다.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여 죽이려하자 연개소문은 자신의 군을 끌고 대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보장왕 시기 실권을 맡았다. 연개소문은 직접 전투에 나서 당군을 몰살시키며 대승을 거두었고 연개소문이 죽을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형제간의 권력다툼으로 장남 연남생은 동생들에게 쫓겨 당으로 도망쳤다. 당으로 투항한 연남생은 고구려 공격에 앞장서며 고구려의 멸망에 힘을 보내었다. 연남산은 평양성이 함락될 때 보장왕과 함께 항복하였고 연남건은 나당연합군에게 붙잡혀 검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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