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백제초기 어라하 온조왕부터 12대 계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16. 17:33
반응형

백제의 왕의 칭호는 '어라하'였다.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라고 부른다.' 어라하는 한자어로 왕과 같다

 

백제 왕조 가계도

백제의 건국자이자 초대 어라하인 온조왕(기원전18~28)는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소서노의 아들이다. 고구려의 왕자였으나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와 적자 유리명왕이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고구려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서노,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십제'라 했다.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위례로 떠나자 비류는 자결했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인 후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본래 성은 '해'였으나 그 계통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으로 삼았다.

 

소서노와 우태

또한 온조의 부친을 소서노의 첫번째 남편이자 동부여 해부루왕 서손 우태라고도 하고, 소서노의 두번째 남편 동명성왕이라고도 한다. 소서노는 졸본 부여왕의 둘째딸이다.

 

온조왕은 기원전 4년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9년 마한을 공격해 패망시키고 마한은 백제에 병합되었다. 10년 왕자 다루를 태자로 삼았다. 장남 혹은 차남은 2대 왕 다루왕이 되고 3남은 덕좌왕으로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덕좌왕은 일본에 정착한 초기 백제인의 한 사람이다.

 

 

백제 2대 어라하 다루왕(28-77)은 온조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의 장남으로 삼국유사에는 온조의 차남으로 기록되었다. 1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28년 왕위에 올랐다. 여러 차례 말갈과의 싸움에서 격퇴하고 56년 우곡성을 쌓아 동북지방 방비를 정비했다. 신라와 여러차례 전투가 있었다.

 

3대 어라하 기루왕(77-128)은 다루왕의 아들이며 85년 신라를 공격하엿으나 105년 평화조약을 맺고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125년 신라가 말갈의 침입을 받자 원병을 보냈다. 아들 개루왕에 대해서는 서자라는 설이 있다. 97년 두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반란을 은유하며 기루왕이 103년 한산에서 사냥해서 신록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잡은 신록이 개루왕일 것이란 설이 있다. 고이왕 또한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고 부여질 역시 기루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4대 어라하 개루왕(128-166)은 기루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으며 132년 북한산성을 쌓았다. 165년 신라 아찬 길선이 반란을 일으켜 백제로 망명하였는데 개루왕은 도망친 길선을 대접하고 망명을 허락했다. 길선이 망명한것에 대해 신라에는 백제와 대립하려는 세력이 늘어갔고 신라가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기도 했다.

 

 

5대 어라하 초고왕(166-214)는 개루왕의 장남이다. 초고왕과 8대 고이왕이 친형제인지에 대한 의견에 논란이 있다. 고이왕이 초고왕의 외삼촌이라는 설도 있다. 개루왕부터 길선의 송환문제로 신라와 대립이 계속되었다. 167년 신라의 서쪽을 공격하고 188년 모산성을 공격, 189년에는 구양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하였다. 190년 신라 원산향을 공격하였고 204년 신라의 요차성을 함락하고 성주 설부를 죽이는 등 신라와 계속 대립하였다.

 

백제 왕조 가계도

6대 어라하 구수왕(214-234)은 초고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말갈, 신라와 많은 전투를 하였는데 대부분 백제가 패하였고 가뭄이나 기근 등 재난이 겹치기도 했다. 234년 구수왕이 죽은 후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렸기에 초고왕의 아우 고이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하기에는 연대상으로 모순이 있기에 고이왕은 구수왕과 다른 지파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7대 사반왕과 11대 비류왕을 형제라고 하기에 7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논란이 된다.

 

7대 어라하 사반왕(234)은 234년 구수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하는 동안 부여고이(고이왕)가 섭정하였고 1년도 안되어 고이왕에게 왕위를 뺏겼다.

 

 

8대 어라하인 고이왕(234-286)은 가계가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는 4대 개루왕의 아들로 <삼국유사>에는 5대 초고왕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루왕이 166년 승하한 후 70년 후에 즉위하여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연대에 논란이 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를 했다. 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때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을 큰 영맹체로 결속하는데 중심역할을 하며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하도록 했다.

 

9대 어라하 책계왕(286-298)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286년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 침입을 막기 위해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왕비는 대방왕 태수의 딸로 보과부인이다. 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책계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고구려를 물리쳤고 이 때문에 고구려와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 298년 한나라군이 맥인들을 이끌고 침입하였고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 전사하였다.

 

 

백제 10대 어라하 분서왕(298-304)은 책계왕의 아들로 책계왕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04년 낙랑군의 서쪽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그해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분서왕이 피살된 후 고이왕계는 몰락하였고 초고왕계인 비류왕이 다시 왕권을 잡았다. 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으나 이후 고이왕계는 왕위에서 사라졌다.

 

11대 어라하인 비류왕(304-344)은 분서왕이 피살되자 그의 아들 계가 아직 어리다 하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서 비류왕을 구수왕의 둘째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라 기술하고도 다른 줄에는 평민으로 살명서 명성을 얻어다는 구절도 있다. 또한 형인 7대 사반왕과 7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기에 형제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344년 비류왕이 승하하자 분서왕의 계가 왕위를 이었다.

 

백제 12대 어라하 계왕

 

12대 어라하 계왕(344-346)은 분서왕의 아들로 분서왕이 피살되었을 때 나이가 어려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비류왕이 사망하자 계왕이 왕위에 올랐다. 2년 후 사망하였으며 이후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며 고이왕통은 끊어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