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백제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1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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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2대 문주왕(475-477)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었으나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따르겠다.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공격하자 태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했다. 신라 군사 1만명과 돌아왔으나 한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그사이 개로왕은 승하하였고 문주왕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일설에는 개로왕이 죽음을 예견하고 태자 문주를 피신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문주왕은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477년 문주왕은 동생인 부여곤지를 내신좌평으로 명하고, 장남 삼근을 태자로 세웠다. 백제의 귀족들 내부 갈등이 심하였던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18대 전지왕의 외척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했다.

 

 

백제 왕조 가계도

백제 23대 삼근왕(477-479)은 부친인 문주왕이 쿠데타에 의해 피살당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해구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478년 해구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진남과 진로에게 군사를 주어 진압하도록 했다. 진남과 진로에 의해 해구의 난이 평정되었고 해구와 공모자 연신을 처형했다. 479년 11월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고 일본에서 온 부여곤지의 아들 모대가 동성왕으로 즉위했다.

 

 

백제 24대 동성왕(479-501)은 부여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난을 평정하고 정권을 잡은 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3년간 진로가 실권을 맡았고 그 후 친정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부여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며 문주왕의 동생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부여곤지가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며 무령왕 설화에 의하면 개로왕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곤지에게 주었으며 곤지가 이를 데리고 일본에 도착하여 낳은 아들이 무령왕이라고도 한다. 461년 개로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후궁과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15년간 일본에 머물며 지내다 475년 고구려가 침입하여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자 귀국하였다. 477년 내신좌평에 취임하였으나 그해 7월 갑자기 죽었다.

481년 신라의 북쪽을 침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소지 마립간), 가야와 함께 격퇴하였고 485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493년에는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고 494년 495년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였다. 498년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말기에는 향략이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으며 500년에는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고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동성왕은 501년 사냥을 나갔다가 위사좌평 백가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병사들에게 시해당했다.

 

동성왕은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인 후궁 비씨에게서 보과공주를 낳았는데 그녀를 신라 법흥왕의 후궁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 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며 동성왕의 동생이라고도 한다. 무령왕릉의 묘지명에 무령왕이 462년에 출생하였고 523년 사망이라 되어있으며 동성왕은 445년 출생 501년 사망하였다. 동성왕과 무령왕과의 나이차이가 17년으로 둘째 아들이라는 설이 믿기 어렵다는 논란이 있다.

 

또한 동성왕의 다른 아들이 일본으로 가서 계체왕이 되었다고 한다. 1914년 일본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된 일본의 국보 인물화상경에 '사마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보낸다' 라는 문장이 있고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백제 25대 무령왕(501-523)은 출생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백제신찬>에서는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그가 동생 부여곤지와 부인을 공유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라는 설이 있다. 무령왕 탄생설화에는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보내었고 그곳에서 무령왕을 낳았다고도 한다. 또한 곤지에게 보내진 부인이 처녀가 아니었다고 곤지에게 처형당하자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임신중이던 자신의 왕비를 곤지에게 시집 보내고 왕비는 무령왕을 출산했다고도 한다. 어쨋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이 백가의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하자, 무령왕은 왕위에 올라 한솔 해명과 함께 백가를 토벌하였다. 당시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 때였다. 무령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무찌르며 국력을 키우며 백성의 삶을 보살폈다. 512년 521년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강화하였고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을 하사하기도 했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문화를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장남 순타태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무령왕을 따라 백제로 갔다. 그후 504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 감금당하자 일본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서 체류하였다. 514년 사망하였으며 일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 법사군을 낳았다. 그의 4대손은 화사씨를 하사받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였다고 한다.

무령왕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성왕이 보위에 올랐다.

 

공주 무령왕릉 입구

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며 많은 역사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돌판 두장이 있었으며 오른쪽 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있다. 무령왕릉에는 다양한 귀금속이 108종 2906점이 있었고 중국 남자의 양나라, 일본까지 동양 3국 문화의 집결체였다.

 

백제 26대 성왕(523-554)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523년 패수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물리쳤으나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을 침략하여 혈성이 함락되었다. 고구려와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여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548년 고구려 양원왕이 한강 북쪽을 공격하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 요청하였고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보내었고 신라 장군 주진이 독산성 아래서 고구려 군사와 싸워 격파하였다. 불교를 진흥했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551년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에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신라는 10개 군을 얻고 백제는 6개 군을 얻었다. 신라 진흥왕은 함경도까지 진출하며 순수비를 세워 영토를 넓혀갔다. 백제는 신라에 고구려 평양성 협공을 제의했지만 고구려는 진흥왕에게 경기도, 황해도 등을 신라 땅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고 진흥왕은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553년 백제는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기고 신라에 포위되었고 그해 왕녀 소비를 진흥왕의 후궁으로 보내기도 했다. 백제는 일본에서 병사를 모으고 성왕은 왕자 창(위덕왕)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했지만 성왕은 신라의 고간 도도에게 살해당했다. 이 전투를 관산성 전투라 불린다.

 

'화랑'의 백제 위덕왕 부여창

 

백제 27대 위덕왕(554-598)은 성왕의 장남으로 554년 성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승계했다. 성왕이 승하한지 3개월만에 고구려는 군대를 끌고 침략하였고 백제의 옛 도읍지인 웅진성까지 쳐들어왔다. 위덕왕은 동맹국 가야와 신라를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신라에 밀려 실패하였고,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가야를 휩쓸어버렸다. 위덕왕은 수나라의 전함이 탐라에 표류해왔을 때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선물을 가득 채워 돌려보냈는데 이 일로 수나라의 신임을 얻었다. 위덕왕은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에서 전쟁을 벌이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비난하였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도와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양견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를 전해들은 고구려는 백제에게 보복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위덕왕에게는 세 아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아좌태좌는 597년 일본으로 가서 쇼토쿠태자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쇼토쿠태자의 초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이다. 또 한 아들이 죽나 탑을 세우고 사리함을 남겼다고 한다. 또다른 아들 임성태자는 일본 우오치씨의 족보에 등장하나 한국에는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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