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조선의 개혁정치가 정조

GoodFortune 2019. 7. 3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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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이전까지는 신하들 사이의 투쟁이었지만, 경종 부터는 신하들은 당이 다르면 임금도 적으로 삼았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의 군주였다. 반 노론이었던 사도세자는 영조와 노론에 의해 뒤주 속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를 이었다.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다른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영조에게는 사도세자가 유일한 왕자였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11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봤다.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를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세손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노론 세력은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사도세자의 후궁인 양제 박씨가 낳은 아들인 은전군을 지지했다. 양제 박씨는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그 아들 은전군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장인이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은 노론의 입장에서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세손의 즉위에도 반대했다. 사위를 죽음으로 내몰고, 손주가 즉위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보면 당시의 당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는 세손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홍봉한의 반대편에 서게 되고 홍봉한과 그의 동생 홍인한 사이에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영조51년 영조는 82세로 연로하였기에 대신들을 불러모아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에 대해 의견을 구하였는데 모든 노론 세력이 반대하였다. 좌의정 홍인한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 세손은 24세였는데 노론이나 영조의 권련을 위협하지 않고 영조에게 효도하여 영조가 항상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항상 세손을 옹호했다. 홍인한의 말을 들은 영조는 대신들을 믿지 못하고 세손에게 선양을 하기로 한다.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고, 홍인한은 영조의 하교를 쓰는 승지를 가로막고 하교를 쓰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만큼 홍인한은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것을 두려워했다.

 

노론 일파는 세손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세손을 모함하는 익명서를 쓰기도 했으나 영조는 동궁을 모해하려는 대신들의 행위를 문책하고 처벌했다. 영조52년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25살 세손이 정조로 즉위했다.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에서 대신들에게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라고 선언했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었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잊지 않은 것이다. 열흘 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다.

 

정조 가계도

정조의 비는 효의왕후로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었다. 영조38년(1762) 10세 때에 세손빈에 책봉되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효의왕후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궁인 출신으로 정조의 승은을 입은 상의 성씨가 있었는데 정조6년(1782) 아들을 출산하여 소용이 되었으며 1783년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자 의빈이 되었다. 1786년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로 죽었을 때 의성 빈씨는 세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문효세자의 장례를 지낸뒤 2개월 후 사망하였다. 정조11년(1787)에 후궁 수빈 박씨를 들였는데 정조14년(1790) 수빈 박씨가 낳자 왕세자로 삼았고 훗날 순조이다. 효의왕후는 정조가 죽은 후에도 궁에서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를 공양하며 순조20년 68세까지 살았다. 수빈 박씨 또한 행실이 바르고 검소했으며 순조 22년까지 살았다. 정조의 후궁으로 의빈 성씨가 있는데 어린 시절 궁에 들어와 정조의 승은을 입었다.

 

드라마 이산의 정조와 의빈 성씨
효의왕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처리했다. 홍인한과 결탁해 자신을 내쫓으려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양 보내고,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홍인한은 여산으로 귀양보냈다. 홍봉한에 대한 처형을 대신들이 주장했지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며 반대를 하여 홍봉한은 처형받지 않았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도 친정오라비인 김귀주의 처형을 반대하였으나, 정조는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가 위리안치 시켰다.

 

또한 김상로와 결탁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 데 일조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의 작호를 박탈해 사저로 내쫓고, 오라비 문성국을 사형시켰다. 이후 숙의 문씨는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노론들이 공격받자, 노론들도 반격에 나섰는데 정조를 살해하려 한 3대 모역 사건이 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홍계희의 아들들이 정조 암살을 꾸몄다. 정조 즉위년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했다. 이 사건을 조사중에 홍계희의 조카인 홍술해의 아내 효임이 주술을 이용해 정조와 홍국영을 살해하려 하기도 했다. 세번째 사건은 홍계희의 8촌 홍계능과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주도하고 혜경궁 홍씨의 오빠인 홍낙임도 참여하여 정조를 쫓아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는데,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렇게 3번의 모역사건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정조는 즉위년 '규장각'을 설립하여 당론에 물들지 않은 문신들을 양성해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 정치를 시도했다. 정조는 능력있는 서얼들을 등용함으로써 개방된 사회로 나아가려 했다. 또한 재위9년 '장용위"를 만들어 국왕을 호위하게 했고, 이 조직을 재위 17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시킨 것이 '장용영'이었다.

 

재위13년(1789) 정조는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수원 용복면의 화산의 백성을 수원으로 이주시키고 사도세자의 시신을 이장한 후 현륭원이라 불렀다. 정조는 재위14년부터 24년까지 현륭원에 12차례 행차하였다. 정조의 능행에는 어가를 따르는 인원이 6000명이 넘고, 말도 1400여 필이나 되었다. 정조는 행차 때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들어주기도 하였다.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능행으로 노론을 무력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숙종20년(1694)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고 영조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 지역 전체를 반역향으로 낙인찍어 출사길을 봉쇄했는데, 이후로는 노론의 독재가 계속 된 것이다. 정조가 재위12년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80여년만에 남인이 정승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재위16년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하였는데, 이 일은 정조와 영남 남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행사가 되었다. 이후 영남 사대부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조사해야 한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정조는 재위24년 5월 연석에서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뜻을 밝혔는데 판중추부사 체제공, 봉조하 김종수, 우의정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낸 주기가 8년이었음을 밝혔다. 당쟁을 없애기 위해 등용하고 내보내는 기준을 두었다고 하며 다음 재상 후보는 남인이라는 것에 뜻을 밝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정조는 종기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가슴에 화기도 있었다. 정조는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는데, 6월 14일 내의원 서용보를 해임하고 이틀 후 이병정을 내의원 제조로 삼았다. 정조는 자신의 종기 부위를 의관들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경계하며 직접 치료했다. 정조의 종기는 머리부터 등 쪽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라 통증을 호소하며 힘들어했다. 정조의 병환이 점점 더 위독해지자 정순왕후는 영조의 병세와 비슷하다며 그 당시 드셨던 탕약 성향정기산을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아무것도 못먹는 정조에게 인삼차와 청심환을 올리겠다며 정조 곁에 있었는데, 정조는 정순왕후만이 그의 곁을 지키던 그 순간 숨을 거두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고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세력들은 부활하게 된다. 정조 때 귀양간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살아있는 일족은 다시 기용되었다. 이렇게 다시 노론의 정권이 시작되었다. 정순왕후는 노론과 함께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키는데 명목은 천주교 탄압이었으나 그로 인해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이 제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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