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비운의 세자 효명세자와 힘없는 임금 순조

GoodFortune 2019. 8. 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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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790-1834

재위 1800-1834

 

효명세자 (익종으로 추대)

1809-1830

 

 

순조는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의 아들이다.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5세에 죽고, 정조24년(1800)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증조부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경주 김씨)가 왕실의 어른이었으므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가 즉위한 후 조선은 세도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력한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자 국정의 혼란과 민생 파탄이 심해졌는데, 유명한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였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순조

 

순조의 왕비는 순원왕후로 영안부원군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다. 정조24년 정조의 뜻에 의해 간택되었는데,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연기되었다가 순조2년(180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9년(1809) 아들을 낳았고, 그는 1812년 4살에 세자로 책봉된 효명세자이다. 

 

순조 가계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잡자 정조가 신임하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들은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사형시키거나 유배보냈다. 당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눠져 있었는데 정권을 잡고 있던 쪽은 노론 벽파였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순원왕후

 

순조4년(1803)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순조5년에 정순왕후가 세상을 뜨면서 순조는 장인 김조순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김조순은 노론 벽파를 제거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노론 시파인 김조순의 세도정치로 안동 김씨는 주요 관직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순조는 효명세자를 아끼며 아들을 믿고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순조19년(1819)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과 혼인했다. 12세에 세자빈이 된 세자빈 조씨는 1827 아들 헌종을 낳았고, 헌종은 순조의 뒤를 이은 조선 24대 임금이 된다. 헌종이 즉위한 후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세자빈 조씨는 신정왕후로 추대되었다. 헌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순조 비인 순원왕후가 있어 아무런 힘이 없었으나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어 고종을 왕위에 올린 대비였다.

 

신정왕후

 

순조27년 2품 이상의 관원들을 불러모아 비망기를내렸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 하였다. 순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하자 모든 대신들이 찬성을 하였다.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 정치로 왕의 권력은 약했고, 안동 김씨 세력들은 순조 때와 같이 세자가 청정을 하더라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순조는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상소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임금이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세자가 종묘와 경모궁 등에 나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는데 절차가 제대로 되지 않자 이조판서 김이교와 전 이조판서 이희갑, 김재창을 월봉 2등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조판서 김이교는 안동 김씨 핵심인물인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자마자 벌을 내린 것이었다. 또한 이후에도 세자는 탐관오리 등에 대한 처벌에 강하게 처벌하였다.

 

세자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안동 김씨 세력을 봐주지 않고 강하게 처벌하자 안동김씨 세력은 세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안동 김씨의 핵심 세력이었는데 순조17년(1817) 33살의 나이로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이후에도 핵심 요직을 역임했다. 당시 지방관을 역임하지 않으면 고위직이 못올랐는데 안동 김씨는 예외였다. 세자는 순조27년 김유근을 평안도 관찰사로 보냈는데 가는 도중 일을 당해 첩과 시종들까지 데리고 가는것이 들통이 났다. 이 일로 사헌부 집의 조경진은 김유건의 처신을 비판하였고, 안동 김씨 세력은 대립을 하게 되었다. 선조와 세조가 조경진의 국문을 하지 않자, 이조판서 김교근은 여러번 사임 요청을 하였고, 세자는 김교근을 사직시키고 장인인 조만영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문관 인사권이 순조의 처가에서 세자의 처가로 옮겨가게 되었다.

 

세자는 순조27년 이면승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노집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대점했다. 이면승은 소론 계열이었는데 노론 정권에서 소론이 대사헌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면승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붕당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조30년(1830) 세자는 대리청정 2년 만에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조정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던 중 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고 20여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가 총애했던 네 명의 대신들 김로, 홍기섭, 이인부, 김노경은 조정에서 쫓겨났고 다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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