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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하노버 왕조 (조지 1세 조지 2세 조지 3세 조지 4세 윌리엄 4세 빅토리아 여왕)

GoodFortune 2022. 9. 1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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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 - 조지 2세 - 조지 3세 - 조지 4세 - 윌리엄 4세 - 빅토리아 여왕

 

독일, 영국의 하노버 왕조는 역사상 유일하게 인도 전역을 통일한 왕조이기도 하다.

하노버 선제후 가문에서 영국 왕위를 얻어 선제후령이 승격하여 하노버 왕국까지 지배했다.

 

조지 1세

1660.5.28~1727.6.11 재위 1714.8.1~1727.6.11

 

조지1세의 태생을 설명하기 위해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인 제임스 1세부터 시작한다. 제임스1세의 딸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1세 시대에 태어나 이름을 여왕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버지 제임스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에서 자라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살게 된다. 10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5녀인 조피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혼인하여 조지 1세를 낳았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 앤 여왕이 사망했을 당시 조피는 사망했을 때였고 그의 아들 게오르그 루트비히(조지1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스튜어트 왕조의 가계도는 이전 포스팅을 참고~)

스튜어트 왕조 가계도

조지1세는 독일태생으로 영국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조지1세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 국가로 들어선다. 조지 1세는 1698년 38세의 나이로 하노버 선제후에 즉위해 게오르크 1세가 되었다.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자 54세의 나이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조지1세는 영국 국왕이긴 했으나 계승 순위로 인해 자리만 맡아줬을 뿐 하노버의 선제후로서 살았다. (그는 외조모만 영국혈통에 해당하는 쿼터였다)

영국 국왕이지만 영어에 서툴렀고 독일어와 프랑스어만 할 수 있었기에 영국인 신하들과 소통도 어려웠다. 언어 문제가 조지1세가 영국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라고 하기에는 벨기에 출신 카를 5세나 노르만 왕조, 플랜태저넷 왕조 초기 왕들도 프랑스어만 썼으니, 조지 1세는 본인 스스로가 영국 보다는 하노버의 선제후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조지 1세가 전격 위임 통치를 하게 되며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하노버는 훗날 비스마르크(독일 통일)에 흡수되어 현재 정체성을 잃으면서 조지1세는 영국 국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내 조피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내 조피의 신분이 자신보자 처지자 미워하였는데 결혼 12년만에 아내에게 불륜 혐의를 씌워 이혼하고 평생 하노버의 성에 유폐시켰다. 이로 인해 아들 조지 2세와의 사이도 나빴다. 딸 조피 도로테아(왜이렇게 이름을 같게 짓는지....)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결혼하였고 그들 사이의 3남이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프로이센 왕국 이야기는 다음에 해보자)

 

조지 2세

1683.10.30~1760.10.25 재위 1725.6.11~1760.10.25

 

조지1세와 조피 도로테아의 아들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감금시켜놓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호엔촐레른 왕가의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결혼하였는데 캐롤라인은 아름답고 총명하여 아이작 뉴턴 등 지식인들과도 교류하며 조지 2세의 정치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담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식민제국과 전쟁을 별였다.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 따서 조지왕의 전쟁(King George's War) 라고 부른다.

캐롤라인에게서 3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데릭은 조지 2세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프레데릭의 아들인 조지가 조지3세에 올랐다.

 

조지 3세

1738.6.4~1820.1.29

재위 1760.10.25~1801.1.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아일랜드 왕국)

1801.1.1~1820.1.29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1760.10.25~1814.10.12 (하노버 선제후)

1814.10.12~1820.1.29 (하노버 왕국)

 

조지 3세는 하노버 왕조에서 처음으로 영국 태생의 군주이다.(조지1세와 2세는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추문이 없고 근면검소한 성품으로 성실하고 독실한 군주로 존경받았다. 재위기간이 59년 3개월로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세번째이고 영국 남성 군주 중에서는 가장 오랜시간 재위한 군주이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큰 사건들이 모두 일어났다. (재위 직후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미국 독립전쟁으로 독립하면서 미국이 건국되었다.)

조지 3세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한 나라로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탄생시켰다.

말년에는 정신병이 시달려 1811년부터 1820년까지 왕세자인 조지4세가 섭정을 맡아서 했다. 막내딸 아멜리아가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아 시작된 정신병이 너무 심하여 하루종일 침대에 묶여있었다고도 한다. 그는 이런 정신병을 갖고 10년을 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9남 6녀 1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샬럿 왕비 출생이다.

(*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나오는 치매에 걸린 왕이 조지3세의 모습이라고 한다.)

15명 자녀 중 9명이 혼인하였고 적손자녀는 8명이었는데 성인으로 성장한 손주는 6명 뿐이었다. 조지 4세의 하나밖에 없는 딸 샬럿 공주가 사망했을 때 조지 3세의 손자 중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왕자들은 차기 왕을 낳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브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의 딸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를 잇고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다. 

 

하노버 왕조 가계도

조지 4세

1762.8.12~1830.6.26 재위 1820.1.29~1830.6.26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장남 조지 4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품행이 좋지 않았다. 경마 등으로 돈을 탕진해 왕실 비용의 절반 수준의 빚을 지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루이 18세)를 후원했다.

아버지가 정신병에 시달리며 1811년부터 섭정하다가 1820년 즉위하였다. 애인 마리아 피츠허버트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나 인정받지 못했고 고종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과 결혼했다. 둘은 조건부 결혼이었기에 시작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외동딸 샬럿을 낳았다. 조지 4세와 사이가 안좋았던 캐롤라인은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에서 쫓겨나 유럽 대륙을 떠돌아 살았다고 한다. (외동딸 샬럿은 1817년 출산 중 사망했다)

조지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캐롤라인은 왕비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왔으나 근위병들의 저지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반발로 캐롤라인이 영국 왕비가 될 수 있었으나 다음해 1821년 사망했다.

유일한 외동딸이 사망하였기에 1830년 조지 4세의 동생인 윌리엄이 왕위를 계승한다.

 

윌리엄 4세

1765.8.21~1837.6.20 재위 1830.6.26~1837.6.20

 

13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수병으로 복무해 '항해왕'이란 별명이 있다.

1772년 왕실혼례법에 따라 왕의 허락이나 추밀원의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그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법률이었다. 이 법률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며 동거를 했는데, 당시에는 조지 3세의 후계가 장남에게 정해져 있던 터라 다른 아들들은 그냥 두었다. 윌리엄 4세는 연극배우 도로시 블랜드 (조던 부인)과 동거를 했다. 20년간 동거하면서 자녀를 10명이나 두었는데 요절, 사산된 적자녀 5명까지 합치면 15명이다.

형의 외동딸 샬롯이 태어나자 왕위 계승 순서는 그녀가 2순위가 되었다(1순위는 그녀의 아버지 조지4세이다.) 샬럿 공주는 성인까지 자라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해 임신했으나 난산으로 아이는 사산되고 자신도 사망했다.

윌리엄 4세는 조던 부인과 이별 후 혼자 지내다 늘어가는 빚을 없애기 위해 추밀원이 추천한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53세의 나이에 26살 신부와 결혼한 제임스 4세는 이후에는 외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델라이드는 자식을 다섯 낳았으나 모두 낳고 얼마 안가 죽었다. 가장 오래산 아델라이드 공주는 2개월 22일을 살았다.

형이 후사없이 죽자 1830년 64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2022년 찰스 3세가 73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전까지 가장 많은 나이로 즉위한 왕이었다)

윌리엄 4세는 후사가 없었기에 조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관심을 보이고 후계자로 기대를 쏟았다. 빅토리아 공주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와 내연남 존 콘로이는 훼방을 놓으며 빅토리아 공주를 조종하며 윌리엄 4세와 떨어뜨려 놓았다고 한다. 그들은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하면 섭정을 맡을 야심을 품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윌리엄 4세는 생일 식사 자리에서 '난 내 조카가 성인이 될때까지 살 테니 네놈들은 섭정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공주가 18세 성인이 된지 26일 후에 사망하였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며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은 해소되게 된다. 하노버 왕국의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올랐다.

 

빅토리아 여왕

1819.5.24~1901.1.22 

재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1837.6.20~1901.1.22

캐나다 자치령 1867.7.1~1901.1.22

인도 제국 여제 1876.5.1~1901.1.22

호주 연방 여왕 1901.1.1~1901.1.22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 부부의 고조모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였다. 

그녀의 아버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는 조지 3세의 4남으로 형 조지 4세의 딸 샬롯이 출산하다 사망하고, 윌리엄 4세의 적자녀들이 일찍 사망함에 따라 그의 딸 빅토리아가 왕위를 잇게 된다. 에드워드는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 이듬해 폐렴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부인 빅토리아는 내연남 콘로이와 함께 딸이 즉위하면 섭정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18세가 된 후에 윌리엄 4세가 사망하면서 섭정 없이 즉위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즉위 직후 어머니의 내연남 콘로이는 연금을 주고 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내쫓았고, 어머니 빅토리아 부인은 거처를 외딴 곳으로 정해 보내버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않는 나라'였던 전성기의 영국을 통치했다.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전개되면서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독칠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영국에 온 외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에게 반해서 1840년 앨버트와 결혼했다.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이 42세에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은거해버리기도 했다. 당시 '윈저의 과부는 물러가라'며 퇴위 여론이 나오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떠밀리듯 복귀했으나 그녀는 검은 상복만 입고 지내며 우울함을 감추지 않았다.

1878년 차녀 앨리스 공주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한 후 막내딸 베이트리스 공주를 더욱 아꼈는데, 베아트리스 공주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딸과 사위가 자기 곁에서 지내는 걸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할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1881년과 1885년 남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영욱군이 패하고, 1882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한 아일랜드에서 총독이 비밀결사에 암살당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자치동맹, 토지동맹을 거쳐 민족동맹을 만들어 영국 의회에 진출하며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끝나고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1897년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를 호화롭게 열었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바로 그가 민영환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긴 시간을 여왕으로 재위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노버 왕조는 빅토리아 여왕에서 끝이 났으며 장남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르며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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