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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과 후계

GoodFortune 2022. 9. 1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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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적차녀로 어머니는 앤 볼린이다.

헨리 8세의 왕위를 이은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에 죽고 누나인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상상임신과 우울증 등으로 5년만에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헨리 8세의 남은 자녀인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 없이 떠나게 되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제임스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이후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아래 가계도를 참고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제국 무적함대를 칼레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하고 잉글랜드가 강대국으로 부상한 기틀을 만든 여왕으로 평가되어 왔는데, 왜 자녀 없이 떠나게 되었을까?

 

잉글랜드는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는데, 가톨릭 교도들은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의 가톨릭 입장을 강하게 하고자 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여러 명문가 사람이 거론되고, 수많은 구혼이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다. 펠리페 2세는 이복언니인 메리 1세의 남편이었기에 바로 깨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경, 신교도 국가의 국왕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등이 구혼하였으나 모두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그녀는 생애 한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는데 셰익스피어 또한 엘리자베스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안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하고 있는데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

성장하면서 안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봤기 때문에.

미혼이라는 신분이 프랑스,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 유리한 자산이기에.

등등 여러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후계가 없었기에 여왕의 사망 이후가 불안했기에 신하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을 계속해서 권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한번 약혼을 한 적이 있는데 대상은 프랑스의 앙리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로 22살 청년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이미 46세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을 나이였다.

그러나 이 결혼도 깨지고 마는데, 프랑수아가 네덜란드 국가원수로 초빙되어 갔다가 반대 세력에게 대패하고 쫓겨나자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이 염려된 엘리자베스는 파혼을 결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죽을 때까지 후계를 정하지 않았는데, 후계를 정하면 자신의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8세의 후손들이 더이상 후손을 남기지 않았기에 튜더 왕조는 끝이난 상태였고, 후손은 헨리 7세의 여계 후손 중 골라야 했다.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결혼을 했고, 그들의 증손자가 제임스 6세였기에 엘라자베스의 6촌뻘 되는 제임스 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주황색 : 튜더왕조, 초록색 : 스튜어트 왕조

엘리자베스 1세는 170cm의 거구에(당시 남성 평균키도 170이 안되었다.) 승마와 사냥을 즐기고 강도 높은 운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하고 원전을 읽고 번역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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