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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편 마지막 무신정권, 원나라에 굴복

GoodFortune 2019. 8. 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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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혜-정-광-경-성-목-현-덕-정-문-순-선-헌-숙-예-인-의-명-신-희-강-고-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창-공양

 

원종 (고려 24대 왕)

1219-1274

재위 1259-1274

 

원종은 23대 왕 고종과 안혜태후 유씨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이다. 1235년(고종22) 관례를 올리고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고종46) 강화를 맺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죽자 차기 후계 게승을 두고 그의 아우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가 대립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원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얼마 후 쿠발라이는 5대 칸으로 즉위하였다. 쿠빌라이가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을 약속받았다.

 

 

 

원으로부터 불개토풍을 보장받았으나 그외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이 모두 격하되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원종 이후의 왕들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시호 앞 글자에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자를 넣고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1인칭인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황제를 부르는 "폐하"는 "전하"로,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인 "태자"는 "세자"로, 황제의 명령을 담은 글인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다.

 

드라마 '무신'의 '김준'

 

원종 즉위 전, 1258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과 류경은 권력을 장악했다. 김준은 1258년부터 1268년까지 10년간 고려의 실권을 맡았다. 김준은 최충헌의 가노였던 김윤성의 아들이었다. 최우에게 신임을 얻었으나 최우의 첩 안심과 간통해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후 최항을 섬기다가 1257년 최항이 죽고 그의 서자 최의가 집권하자 불만을 품었고, 1258년 임연 등과 함께 삼별초를 앞세워 최의를 죽였다. 최충헌의 노비였던 김준은 최씨정권을 타도하여 위사공신이 되었다. 김준은 최고 권력자 자리인 교정별감자리에 까지 오르는데,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 때문에 김준의 측근들이 멀리하고 떠나버렸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9) 측근이자 양아들이었던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다. 임연은 김준의 일가를 멸문지화 시키고 측근들도 처형했다. 이후 실권은 임연이 잡게 되었다.

 

1269년(원종10) 임연은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왕창을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이때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다. 태자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다. 임연은 집권한지 1년만에 병사하였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집권하였지만 3개월 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하면서 100년간의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개경환도를 반대하던 무신세력이 제거되고, 원나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1270년(원종11) 38년만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개경환도 이후 원나라는 고려 황실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원나라 황족의 딸들을 고려 임금과 혼인시켜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시켰다.

 

 

1269년(원종10) 서북면병마사의 기관인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11) 쿠빌라이는 자비령 이북의 영토를 직속령으로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에 임명하였다. 원종은 원나라에 입조하여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1) 원나라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1290년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반환하고 동녕부는 요동으로 옮겼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삼별초의 항쟁(삼별초의 난)은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가 몽골(원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무인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씨무인정권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최씨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원종과 신료들이 몽골에 항복한 후 원종은 삼별초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고려 원종의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으나 1273년(원종14)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고려 원종 가계도

 

원종의 왕비는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 정순왕후(=경순왕후)이다. 원종이 태자이던 시절 입궐하여 1235년(고종22)에 정신으로 혼례를 올려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1236년 아들 충렬왕을 낳고 1237년 세상을 떠났다. 2비는 경창궁주 유씨로 원종희종의 딸인 가순궁주의 딸이다. 충렬왕 즉위 후 자신의 차남인 순안공 왕종을 위해 기도를 하였는데 이것이 충렬왕을 저주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국대장공주와 결혼시켜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무고를 받아 폐서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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