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의 전락 - 고려 충렬왕

GoodFortune 2019. 8. 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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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고려 25대 왕)

1236-1308

재위 1274-1308

 

고려 25대 왕 왕거는 원종과 순경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렬왕이다. 원종 때에 원나라에 굴복된 고려는 충렬왕부터 원나라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로 '충'자로 시작하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충렬왕 이전의 왕인 고종과 원종 또한 원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 고종은 충헌왕, 원종은 충선왕이었다. 왕의 칭호가 '종'보다 낮은 단계가 '왕'이었는데 충렬왕부터는 '종'의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는데, 충렬왕은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였다.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손자로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킨 지도자였다. 

 

 

'왕은 사랑한다'의 충렬왕과 원성공주(제국대장공주)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모든 고려왕들은 원나라 종실의 딸을 정비 또는 후궁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원나라 공주에서 난 아들을 원칙으로 왕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세자로 있을 때 볼모로서 북경에 머물다가 즉위하게 되었다. 고려 왕은 몽골식 이름을 갖게 되고, 몽골식 변발과 의복을 입었고, 일상생활에서 몽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 황제가 고려 왕을 즉위하게 하거나 폐위하게 하였고 사형하거나 귀양 보내기도 하였다. 충렬왕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었고, 고려 왕실의 격도 낮아졌다. '짐'은 '고'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격하되었다.

 

충렬왕은 1260년(원종1)에 태자 책봉되었으며 1272년 원나라에 가서 1274년(원종15)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해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고려 충렬왕 가계도

 

충렬왕의 1왕비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라고도 한다.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이다. 16살 어린 나이에 39세의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1275년 아들을 낳았고, 그가 충렬왕을 이은 고려 왕실의 최초의 혼혈 왕인 충선왕이었다. 충선왕부터 창왕에 이르기까지 원나라 출신의 왕비들은 모두 제국공주와 혈족 관계에 있다.

2왕비는 시안공 왕인의 딸이자 신종의 증손녀인 정화궁주였다. 정화궁주는 1260년(원종 원년)에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늦게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의 공주였기에 후궁으로 물러나야 했다. 정화궁주의 장남 강양공 왕자는 충렬왕의 맏아들이었으나 원나라 공주의 소생이 아니었기에 왕위에서 밀려나 충청도의 동심사로 출가해야 했다.

3왕비는 숙창원비 김씨이다. 김씨는 진사 최문에게 시집을 갔다가 젊어서 과부가 된 여인이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사망에 화가 난 충선왕은 원인을 충렬왕의 애첩인 무비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무비를 죽였다. 무비를 죽인 후 충렬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김씨를 바쳤다고 한다. 충선왕이 즉위한 후 숙창원비의 오빠인 김문연의 집에서 충선왕과 숙창원비가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충선왕은 숙창원비를 숙비로 진봉시켰다. 당시 감찰규정 우탁이 부왕의 후궁과 관계를 가진 것을 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몽고에는 부왕이 사망할 경우 모후를 제외한 부왕의 후궁들을 그 아들이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충선왕 또한 이러한 풍습을 따라 했을 것이라 추축된다.

 

 

 

1277년(충렬왕3)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이 설치되었고, 1280년(충렬왕6)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정벌을 준비했다. 쿠빌라이는 일본에도 몽골에 복속을 요구했으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하였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으려고 출병 준비를 했다. 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 정동행중서성, 정동행성이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차 원정, 1281년(충렬왕7) 2차 원정도 실패하였다. 두번의 원정으로 고려는 많은 피해를 받았다.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했고 원나라의 속방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였고, 지배를 받았다. 관제가 충소, 개편, 폐합되었는데, 3성이 통합되어 첨의부로,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이부, 예부를 합쳐서 전리사로, 호부는 판도사, 병부는 군부사, 형부는 전법사로 하였고, 공부는 없앴다. 원나라는 고려에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두었고 제주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다.

 

충렬왕은 즉위 초부터 응방을 설치하여 사냥을 즐기는 등 향락에 탐닉하는 생활을 하여 백성의 원성이 많았다. 사냥 뿐 아니라 무비라는 궁인을 총애하여 사냥을 나갈 때 반드시 무비를 데리고 가서 즐기기도 했다. 제국공주는 연회를 즐기기를 좋아하였고, 자신과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하였다. 제국공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충렬왕은 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공주는 이에 분노하여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만들었다. 이날 충렬왕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가 무릎을 끓어 앉아 공주에게 술잔을 올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277년(충렬왕3)에 충렬왕과 공주가 천효사에 갔는데 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며 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다. 이때 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고, 다시 천효사에 갔는데 이때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갔다며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가 기존의 고려 출신 왕비와는 다른 대접을 받으며, 국왕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1277년(충렬왕3)에 충렬왕의 아버지인 원종의 2비 경창궁주와 그 아들 순안공 왕종이 자주를 행한다는 무고가 올라왔는데, 경창궁주가 순안공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위에 오르려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충렬왕은 경창궁주를 국문하고 순안공에 대해 친국 하였는데, 대신들이 이들을 용서하기를 청하여 충렬왕은 재산을 적몰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하였다. 대신들이 원나라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으나 공주가 재산을 적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재산이 공주에게 몰수되기도 하였다. 경창궁주는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순안공은 섬으로 유배 보내졌다.

 

 

1296년 11월 세자인 충선왕과 원의 계국대장공주의 혼례가 있었는데 충렬왕과 왕비는 직접 중국 연경을 방문했다. 이듬해 5월 충렬왕과 왕후가 귀국하였는데 귀국한지 보름만에 왕후가 병들어 죽었다. 당시 제국공주는 39세였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자 왕원은 급히 귀국하였는데, 왕후가 죽은것이 충렬왕이 총애한 궁인 무비 때문이라며 무비를 포함한 충렬왕의 수족들을 처단했다. 충선왕은 이때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는데, <고려사>에 세자가 예쁜 과부를 왕에게 바쳤다 라고 기록되었다. 제국공주와 무비 및 측근들을 잃은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에게 양위를 요청했다. 1298년(충렬왕24) 세자와 계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왔고 충렬왕은 세자에게 양위하였는데, 충선왕은 계국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충선왕이 국새를 빼앗기는 등 음모사건이 발생하자 원황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고 왕위는 다시 7개월만에 충렬왕에게로 돌아왔다.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떠났고 왕위를 다시 받은 충렬왕은 그후로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재위 34년만인 1308년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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