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그들의 왕비

GoodFortune 2019. 8. 10.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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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고려 27대 왕)

1294-1339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충혜왕 (고려 28대 왕)

1315-1344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충숙왕은 고려 26대 왕 충선왕과 몽골 출생 의비 야속진 사이의 차남이다. 1299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세자였던 형 왕감이 죽은 후 충선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와서 즉위하였다.

 

또한 1316년 충선왕은 심양왕 자리를 조카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왕고는 충렬왕의 장남 강양공 왕자의 아들이다. 왕고는 원나라 양왕의 딸과 혼인해 원나라 부마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고려 충숙왕 가계도

충숙왕의 1비는 원나라 영왕의 딸 복국장공주 역린진팔라 였다. 1316년(충숙왕3)에 축숙왕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고려로 왔다. 축숭왕이 덕비(=공원왕후=명덕태후)만을 가까이 하자 심하게 질투하였고, 충숙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복국장공주는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319년(충숙왕6)에 사망하였는데, 1321년(충숙왕8) 원나라 중서성에서 선사 이상지를 보내 공주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이때 궁인과 요리사가 "충숙왕과 덕비가 몰래 동침하자 공주가 질투하여 왕이 공주를 구타했으며 공주가 코피를 흘렸다. 그후에도 왕이 공주를 구타하는 것을 어신부개 등이 말렸다"라고 진술하였다. 충숙왕과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공원왕후가 먼저 혼인하였으나 <고려사>에서는 복국장공주를 1비로 기록했다.

 

 

충숙왕의 2비는 조국장공주로 원 순종의 아들 위왕 에무게의 딸이었다. 1324년(충숙왕11) 충숙왕과 혼인하였고 이듬해에 고려로 왔다. 그해에 한양 용산에 행차했다가 아들을 낳고,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출생지를 따서 용산원자라 하였는데, 1341년(충혜왕 복위2) 원나라에서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기황후'의 경화공주와 충숙왕

충숙왕의 3비는 경화공주로 원나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추정된다. 1332년(충숙왕 복위 원년) 결혼하여 이듬해 고려로 들어왔다. 충숙왕 사망 후에 연안궁에서 지냈는데 1339년(충혜왕 복위 원년) 충혜왕이 경화공주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그 후 경화공주도 답례를 베풀었는데 충혜왕은 이날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 충혜왕은 경화공주 외에도 수비 권씨, 외숙 홍융의 처 호아씨를 강간하는 등 패륜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일로 경화공주와 충혜왕 사이에 사이가 안좋아지고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는 일이 일어났다.

 

충숙왕의 4비는 남양 홍씨 홍규의 딸인 공원왕후(=명덕태후) 홍씨였다. 충숙왕과 가장 먼저 혼인하였으나 원나라 출신 왕비들에 밀려 4비로 기록되었다. 부왕 충선왕의 후궁 순화원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1313년(충선왕5) 충숙왕과 혼인하여 1315년(충숙왕2)에 맏아들 왕정(=충혜왕)을 낳았다. 그후 원나라 출신의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가 고려 왕실에 들어오며 홍씨는 종실 정안공 집으로 나가서 지냈다. 충숙왕은 홍씨를 총애하여 밤마다 궁을 나와 정안공 집에 거처하여 복국장공주는 당시 덕비였던 홍씨를 매우 미워했다. 1319년(충숙왕3)에 복국장공주는 급사했고 1325(충숙왕12) 조국장공주는 산욕으로 죽으며 충숙왕과 홍씨는 더욱 깊어졌다. 1330년(충숙왕17) 홍씨는 차남 왕기(=공민왕)을 낳았다.

 

후궁인 수비 권씨는 안동권씨 권렴의 딸로 밀직상의로 있던 전신의 아들 아내였다. 권형은 1335년(충숙왕 복위4) 충숙왕의 내지를 받아 딸을 이혼시키고 왕의 후궁으로 보냈다. 충숙왕이 사망한 후 충혜왕에게 강간을 당하였고 다음해 사망했다.

 

 

 

1322년(충숙왕6) 심양왕 왕고는 고려 왕위 찬탈에 뜻을 품고, 사촌형인 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청사를 돌보지 않는다며 참소했는데, 이 때문에 충숙왕은 원나라에 5년간 체류하였으며 그떄 왕인까지 빼앗겼다. 충숙왕은 사촌아우인 심양왕 연안군 왕고의 쿠데타 기도와 국내 친원세력의 암살 위협에 여러번 시달림을 당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심양왕이 1323년 축출되었지만, 1325년에 귀국한 충숙왕은 보위를 심양왕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한종유 등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하고 왕자 왕정(=충혜왕)을 세자로 삼은 뒤 1330년 양위하였다.

 

충혜왕은 고려 28대 왕으로 충숙왕과 명덕태후의 장남이다.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후 공원왕후 홍씨와 충숙왕 사이는 멀어졌는데, 신하들이 이간질하는 말을 충숙왕이 그대로 믿어버리는 바람에 공원왕후는 고향으로 추방되고 아들과의 대변도 금지되었다. 충혜왕은 31대 왕 공민왕과 친형제 사이이기도 하다.

 

고려 충혜왕 가계도

 

1330년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충혜왕은 당시 가치가 너무 커서 화폐로 쓰이기 힘든 은병의 통용을 금하고 오종포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을 통용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5도에 소금을 관리하는 염장도감을 설치하였다. 원나라의 쌍성, 요양, 심양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귀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소행이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2년만에 원의 명으로 1332년 폐위되었충고 숙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충숙왕이 복위되고 공원왕후 홍씨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당시 충혜왕을 지지해준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원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태보 바이안이 충혜왕의 폐위를 주청했었다. 충혜왕은 총명했지만 어려서부터 술 마시고 방탕하게 노는 것에 익숙했던 왕이었다. 그는 원나라로 다시 돌아가 엘테무르의 아들 등과 술을 마시며 여자를 희롱하며 지냈다.

 

 

 

충숙왕이 1339년(충숙왕 복위7) 세상을 떠나자 충혜왕은 부왕의 후비 수비 권씨와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숙 홍융의 처를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없고 패륜을 일삼았다. 이런 이유로 원나라 바이안은 충혜왕의 즉위를 반대하여 고려 왕위는 그해 11월까지 비어 있었다. 그때 심양왕 왕고를 고려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 등의 반란이 있었으나 충혜왕의 군사들이 반란을 평정하여 반란은 실패하였다. 충혜왕은 원나라에 왕위 계승 요청을 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은 원나라 귀족 출신인 경화공주의 간강 사건으로 그의 국새를 빼앗아 경화공주에게 주었다.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는데, 충혜왕을 미워하던 바이안이 권력을 잃고 원나라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충혜왕은 왕위에 복위되고 6개월만인 1340년 5월 고려로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기황후'에서는 충혜왕을 성왕으로 그려 역사왜곡 논란이 있었다.

 

충혜왕의 1왕비는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로 원나라 황족 출신이다. 1330년(충숙왕17) 충혜왕과 혼인하여 고려와 들으와 연경궁에서 거처하였다. 충혜왕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29대 왕 충목왕이다. 즉위 당시 8세였던 충목왕을 대신해 섭정하며 국사를 처결하였다. 그녀는 30대 왕인 충혜왕과 희비 윤씨의 아들 충정왕이 즉위한 후에도 정사에 관여하였다. 1375년(우왕1)에 사망할 때까지 고려에 지내면서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충혜왕의 2왕비는 희비 윤씨이다. 찬성사를 지낸 윤계종의 딸로 1337년(축숙왕 복위5) 아들 충정왕을 낳았다. 1348년(충목왕4)에 충목왕이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그녀의 아들 충정왕이 즉위하였다. 충정왕 즉위 후 윤씨의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충정왕이 공민왕에게 선위하고 강화도로 물러나자 윤씨는 며칠을 울부짖으며 지냈고, 공민왕의 허락을 받고 강화도에 가서 충정왕을 직접 만나고 돌아왔다. 희비 윤씨의 외숙부 민변의 아들 민제는 희비의 외사촌이 되는데, 민제는 조선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충혜왕의 3비는 화비 홍씨로 홍탁의 딸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3) 충혜왕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화비 홍씨는 재상 윤침의 집에 살았는데 충혜왕의 사랑이 오래가지 않고 끊어졌다고 전한다.

 

충혜왕의 4비는 후궁 은천옹주 임씨이다. 상인 임신의 딸로 은천옹주 임씨 역시 사기그릇을 팔던 상인이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충혜왕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다. 은천옹주에 봉해졌지만 사람들은 사기그릇을 팔던 것을 비꼬아 사기옹주, 오지옹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에게 자신이 거처할 신궁을 짓게 하기도 하고 사치가 심하였다. 아버지 임신은 충혜왕이 1343년(충혜왕 복위4) 원나라에 압송될 때 함께 압송되었다가 돌아왔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의 다른 궁인들 120여 명과 함께 궁에서 추방되었다. 충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왕석기를 두었는데 충정왕의 명에 의하여 훗날 승려로 출가하고 원나라에서 거주했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에 의해 부산 만덕사에 유폐되었고, 1356년(공민왕5) 일부에서 석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린다는 역모가 고해져 관련 인물들이 참형을 당하고 석기는 제주로 유배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4)에는 삼현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는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소란이 있었다. 충혜왕은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고 유흥에 탕진하였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였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비롯한 고려의 신하들이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황음무도를 고발하였고, 1343년 11월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에게 구타를 당하고 포박 당해 원나라로 끌려가 유배를 가는 판결을 받았다. 1344년 유배지인 게양으로 가는 도중 죽었는데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렇게 충혜왕은 주색을 일삼으며 방탕항 행동을 하다가 30세의 나이로 떠났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몽골의 공주들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들이 원한 결혼이 아니었고, 원나라의 부마로 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원나라에 부마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고려에서는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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