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최초의 혼혈왕인 충선왕

GoodFortune 2019. 8. 10. 15:46
반응형

충선왕 (고려 26대 왕)

1275-1325

재위 1308-1313

 

충선왕은 고려 25대왕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다. 고려 이름 왕장, 원나라 이름은 이지르부카이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고 태어난 첫 혼혈왕자였다. 1275년 태어나 1277년(충렬왕3) 세자에 책봉되었고 1291년(충렬왕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의 호를 받았다.

 

충선왕 가계도

 

충선왕의 1왕비는 원나라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린이다. 1296년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 충선왕이 자신보다 조비를 더 총애하자 시기하였다고 한다.

2왕비는 원 출신의 후궁으로 의비 야속진이다. 충선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자주 머물렀는데 그 때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의비 소생의 둘째 아들 충숙왕이 1294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계국대장공주보다 일찍 혼인했을 것이다.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광릉군 왕감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310년(충선왕2) 부왕 충선왕에 의해 살해당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출신 부인인 의비와 계국공주대장과 혼인하기 전, 허원후 왕영, 홍문계, 조인규의 딸을 비로 맞이했었다. 3비인 왕영의 딸 정비 왕씨는 1287년(충렬왕13)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공녀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원나라에 공녀를 보냈고, 훗날 조선 세종 때 폐지되었다. 왕씨가 공녀로 선발된 사정을 들은 세자는 왕씨의 공녀 차출을 면하게 해주었고, 왕씨는 1289년 세자비로 책봉되었다. 가장 먼저 혼인했지만 원나라 공주와 의미에 밀려 3비가 되었다. 당시 원 세조는 근친혼이라 이들의 혼인을 비난했고, 충선왕은 1308년 동성끼리 혼인할 수 없도록 하고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개의 가문을 선정하였다.

4비인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충선왕의 세자 시절에 2비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계국대장공주의 질투를 받게되었다. 

 

5비인 순화원비 홍씨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셋째딸로 그녀의 동생은 충숙왕 비인 공원왕후이다.

6비인 순비 허씨는 전남편이 제안공 왕숙의 아들 평량공 현이었던 과부 출신이다. 충선왕과 사이에 자녀가 없으나 전 남편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7비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후궁이 있으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덕흥군 왕혜는 훗날 1364년 기황후, 최유 등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국왕 자리를 노려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최영과 이성계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후 원에서도 비행을 저질러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갔다.

 

1297년(충렬왕23)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원인을 충렬왕의 애첩인 무비 때문이라 생각하고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국하여 충렬왕의 애첩 무비와 측근들 40여 명을 죽였다. 이 일을 계기로 충렬왕은 왕위를 아들인 충선왕에게 선위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 공주인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로 왔고, 충선왕은 왕위에 올랐다.

 

3비 정비 왕씨

1298년(충선왕 즉위) 공주는 원나라 태후에게 "조비가 저를 저주하여 왕이 저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얼마 후 궁궐 문에 익명서가 뭍었는데 익명서에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 저주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 익명서로 인해 공주는 조인규와 처, 조인규의 아들, 조인규의 사위와 딸들을 모두 가두었다. 원나라에 이 사실을 고하였고, 이 일로 조비를 가두었다. 조인규의 처가 국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을 했고, 조씨 가족은 모두 원나라에 압송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자 정방을 폐지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군제, 세제를 정비했다. 조비의 일로 계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지며 원나라에 불신을 받아 7개월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어 돌아갔는데, 당시 간신 왕유소 등이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 왕전을 후사로 삼으려는 모의를 꾸몄다.

 

'왕은 사랑한다' 고려 26대 충선왕

 

1305년(충렬왕31) 원나라의 성종이 죽고 황휘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을 도왔다. 무족은 충선왕을 도와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에 봉해졌고,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왕위를 이었다. 복위 후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잡업 장려, 동성결혼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혁신정치를 단행했으나 얼마 못가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제안공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갔다.

 

충선왕이 즉위 후 얼마 안되었을 때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정을 통하고 그녀를 숙비로 진봉시켰다. 몽고에는 부왕이 사망할 경우 모후를 제외한 부왕의 후궁들을 그 아들이 취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이러한 풍습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숙창원비는 몽고 고유의 머리 장식인 고고를 황후에게 선물받고 연회를 열며 의복 또한 공주와 같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1312년(충선왕4) 충선왕은 삼현에 숙창원비의 집을 짓게 하고, 1325년(충숙왕12)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시신이 고려로 왔을 때 그 빈소를 숙창원비의 숙비궁에 차리기도 했다.

 

 

1313년(충선왕5) 아들 강릉대군 왕도(=충숙왕)에게 전위하고 삼양왕 왕위는 충선왕의 조카이며 강양공(=충렬왕 장남)의 아들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는데, 고려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탈탈불화가 후계자가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가 멸망했다.

 

충선왕은 왕위를 물려준 후 중국 연경에 머무르며 만권당을 지어 고금서적을 수집하였다. 이제현, 조맹부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320년(충숙왕7) 원나라의 인종이 죽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임파이엔토그스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에 귀양갔다가 매부인 원 태정제가 즉위하고 이제현 등의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났다. 1325년(충숙왕12) 5월 원나라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고려로 옮겨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