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통일신라 후삼국

신라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 혜공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1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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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681-692)은 문무왕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다. 665년 형 소명태자가 사망하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문무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681년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 정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강화를 꿈꾸었으나 실패하였고 그의 딸도 폐위되었다. 683년 김흠운과 요석공주의 딸(신목왕후)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신라 중대 가계도

 

신문왕은 682년 국학을 설립하였고, 683년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의 안승에게 관직과 함께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반발하여 보덕국이 지배하는 금마저에서 안승의 조카 대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신문왕은 전국을 9주5소경으로 나누어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689년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면서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692년 붕어하였다.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692-702)이 32대 왕위에 올랐다. 효소왕은 691년 5세에 태자 책봉되었고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려 재위하는 10년동안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16세로 세상을 떠나며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동생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덕왕(702-737)이다.

 

성덕왕 즉위 후 6년간 모후 신목왕후가 섭정하였고 이후 친정하였다.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704년 김대문이 <화랑세기> <계림잡전> < 한산기> <고승전> <악본> 등의 저술을 남기도록 하였다. 712년 김유신의 출가한 미망인 김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728년 성덕왕은 상대등 배부의 퇴임을 허가하여 신라에서 상대등 최초의 해임이 있었다. 성덕왕은 백관들의 지침서인 <백관잠>을 지어 신하로서 왕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에 대한 조공을 빈번히 보내고 왕자나 왕제를 당에 숙위시켰다. 713년 당으로부터 신라왕의 작위를 받았다. 723년에는 신라의 여자를 바치기도 했는데 당 현종은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발해와 당 사이에 대립이 심하였는데 발해 무왕은 당을 공격하였고 당은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발해를 치러 가던 중 폭설을 만나 얼어죽은 병사가 반을 넘자 발해 공격을 포기하였고 신라도 출병하지 않았다.

 

성덕왕은 737년 승하하였으며, 신라 중대 왕 중 가장 오랜 기간인 36년을 재위하였다. 성덕왕의 왕비 성정왕후 김씨는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이었고 엄정왕후라고도 한다. 704년 입궁했다가 716년에 출궁하였다. 출궁하며 채색비단 5백필, 밭 2백결, 조 1만섬을 받았으며 강신공의 옛 집을 사들여 거처로 내려주었다. 두 아들 중 장남 효상태자(중경)는 717년 사망하였고, 차남 승경이 724년 태자로 책봉되어 효성왕으로 34대 왕이 된다. 후궁 소덕왕후 김씨는 이찬 김순원의 딸로 720년에 납비 되었고 724년에 사망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헌영은 훗날 경덕왕이며, 딸은 사소부인으로 김효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37대 왕 선덕왕이다.

 

신라 중대 가계도

 

제34대 왕 효성왕(737-742)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성정왕후 김씨이다. 739년 김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맞았고 이복동생 헌영을 태자로 삼았다. 효성왕이 후궁 영씨를 총애하자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후궁을 모살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후궁의 아버지 파진찬 영종이 740년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고 영종을 처형했다. 재위 6년, 742년에 사망하였다.

 

제 35대 왕 경덕왕(742-765)은 성덕왕과 소덕왕후의 아들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739년 태자 책봉되었고 742년 효성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은 제도, 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였고 757년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한자식으로 개혁하였다.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였고,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하여 아들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은 한국에서 가장 큰 종으로 국보29호로 지정되었고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불국사가 완공되었다.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 봉덕사종

 

경덕왕의 왕후인 경수왕후(만월부인)은 삼모부인이 아들이 없어 궁에서 쫓겨난 후 차비로 들어갔다. 후비가 되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경덕왕이 불국사 승려 표훈으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아들을 낳도록 간청하게 하였고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하늘님이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은 나라를 멸망시켜도 사내 아이들 달라고 하였다고 <삼국유사>에 탄생설화가 전한다.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765-780)은 제36대 왕이며 8살에 즉위하여 모후인 경수왕후(만월부인)가 13년간 섭정하였고, 이후 778년부터 780년까지 친정하였다. 768년 일길찬 김대공과 아친 김대렴이 반란을 일으켰고,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775년 이찬 염상과 정문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혜공왕 때에 많은 반란이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780년 김지정의 난에서 혜공왕이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이 김양상, 김경신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 직통이 단절되었다.

 

신라 중대 왕계보

29대 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가 신라 중대이며, 이후는 신라 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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