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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37대 선덕왕부터 44대 민애왕까지

GoodFortune 2019. 9. 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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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7대 왕 선덕왕(780-785)은 내물 마립간의 10대손이자 성덕왕의 외손으로 이름은 김양상이다. 아버지는 김효방,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이다. 경덕왕23년 764년에 아찬을 거쳐 혜공왕10년 774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혜공왕과 일족이 김지정에게 피살되자 김경신(38대 원성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살해했다. (삼국유사에서는 혜공왕이 김양상, 김경신에게 피살되었다 한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자 후계자를 결정할때 내물왕 12대손 김경신과 무열왕 8대손 김주원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갈등이 생겼다. 김주원은 강릉 김씨 세보에 따르면 '무열왕-김문왕(또는 김인문)-김대충-김사인-김유정-김주원' 으로 내려온다. 김주원은 금성으로 오기 전 알천 강가의 냇물이 불어 건너오지 못하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왕 가계도

 

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38대 왕 원성왕(785-789)이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삼국사기에는 선덕왕 김양상과 형제뻘이라는 설도 있어 가계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김경신이 원성왕 즉위 후 선덕왕의 조부인 원훈의 사당을 폐쇄한 기록이 있어 신뢰가 떨어진다. 원성왕은 성덕광, 개성왕의 사당을 허불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과 조부 흥평대왕(추존), 부친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였다.

12년간 친정하였으며 승하하기 전 1년간 왕태손 김준옹이 대리청정을 하였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학문 능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였다. 기존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 위주의 인재 등용을 지양하였는데, 골품제의 제약과 진골귀족들의 관리 독점으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원성왕의 왕비 숙정부인은 각간 김신술의 딸이며 3남2녀를 두었다.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은 785년 태자 책봉되었으나 791년 사망하였고, 차남 김의영이 792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4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장손인 김준옹(39대 소성왕)이 794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798년 왕위에 오른 제39대 왕 소성왕(798-800)은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과 성목태후의 장남이다. 병약하여 재위 1년 후인 799년부터 아우인 김언승(41대 헌덕왕)이 대리청정하였다.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어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왕비는 대아찬 숙명의 딸 계화부인 김씨이며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이 30대 왕 애장왕이며, 딸은 장화부인으로 숙부인 흥덕왕의 왕비가 된다.

 

소성왕이 죽은후 아들인 김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40대 왕

신라 하대 가계도

애장왕(800-809)은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숙부인 김언승(41대 헌덕왕)이 섭정하였다. 805년 친정을 시작하였고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애장왕의 왕비는 왕후 박씨와 후궁 김씨가 있고 자식은 기록에 없다. 애장왕은 809년 숙부 김언승과 김제옹의 반란으로 동생 김체명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41대 헌덕왕(809-826)은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과 성목태후의 차남이다. 형 소성왕이 병약하여 799년부터 대리청정 하였고 조카인 애장왕 시기에도 5년간 섭정을 하였다. 801년 이후 상대등이 되었고 809년 동생 김제옹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를 이었다.

 

822년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웅진을 수도로 하고 장안국을 세웠다. 이전 백제의 영역을 중심으로 김헌창을 지지하여 왕권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김헌창의 반란은 1개월만에 진압되었으나 825년 그의 아들 김범분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왕후는 귀승부인으로 헌덕왕의 숙부인 각간 김예영의 딸이며 아들 김장렴, 김헌장 등을 당나라에 입조시킨 기록이 있으나 822년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동생 김수종(42대 흥덕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42대 왕 흥덕왕(826-836)은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생으로 김인겸과 성목태후의 4남이다. 809년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을 지지하였다. 819년 형 상대등 김숭빈이 사망하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826년 헌덕와이 죽자 즉위하였다.

828년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았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들어가 군중 소장이 되었다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지키게 되었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이고 왕자 김능유가 있었는데, 승려 9명과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 831년 바다에 빠져 죽었다. 김능유가 죽고 다른 후사가 없이 죽자 상대등인 사촌동생인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제륭(43대 희강왕)이 왕위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김균정은 김제륭과 적판궁에서 싸웠고, 김균정은 제륭의 병사에게 죽어 왕위는 김제륭(희강왕)에게 돌아갔으나 훗날 김균정의 두 아들은 45대 신무왕과 47대 헌안왕이 되며 손자는 46대 문성왕이다.

 

43대 왕위에 오른 희강왕(836-838)은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과 포도부인의 아들이다. 836년 흥덕왕 사후, 숙부 김균정과 대립하다 김균정이 죽으며 즉위하게 되었다. 자신이 왕위 계승을 지지한 김명(44대 민애왕)을 상대등에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였는데, 838년 재위 3년만에 김명, 이홍이 군을 일으켜 왕의 측근의 귀족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희강왕은 궁중에서 목을 묶어 자살하였다. 왕비는 문목왕후로 김인겸의 손자 김충공과 귀보부인의 딸이다. 문목왕후와의 사이에 아들 김계명을 두었으나 왕위는 문목왕후의 오라버니인 민애왕에게로 이어졌다. 훗날 김계명의 아들이 48대 경문왕이다.

 

 

 

 

44대 왕 민애왕(838-839)은 김충공과 귀보부인의 아들로, 선대왕 희강왕의 오라버니이다. 민애왕 김명은 835년 시중에 임명되었다. 흥덕왕 사망 당시 김균정과 김제륭이 대립할때 민애왕의 두 누이가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과 혼인하여 두 사람이 매형이었다. 이때 김제륭을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하였고, 837년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이홍과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 측근들을 죽이고 왕을 핍박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드라마 '해신' 김양

 

민애왕의 아버지 김충공은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였으며 헌덕왕과 흥덕왕 때에 실권자였다. 흥덕왕의 아들(김능유)이 당나라를 다녀오다 죽자 태자로 임명되었지만 흥덕왕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45대 신무왕)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해진 장보고에게 군사를 요청하였고 김양(무열왕의 3남 김문왕의 후손)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크게 이기고 민애왕이 도망갔으나 김양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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