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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45대 신무왕부터 52대 효공왕

GoodFortune 2019. 9. 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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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신무왕(839)은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과 진교부인(헌목태후) 박씨의 아들 김우징이다. 흥덕왕 사후 상대등 직에 있던 아버지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제륭(희강왕) 사이에서 아버지가 제륭에 의해 죽자 김우징은 청해진 장보고에게 달아났다. 이후 희강왕이 김명(민애왕)의 반란으로 자결하고 왕위에 오르자 김우징은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김우징의 장군 김양의 군사가 왕의 군대를 이기고 민애왕이 시해당하였고, 신무왕(김우징)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들 김경응(문성왕)을 태자로 삼고 민애왕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장보고를 감의군사에 임명했다. 또한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할 약속도 하였다.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지 6개월만에 쓰려져 사망하였다. 이후 아들인 김경응이 46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가 문성왕이다. 신무왕의 3남 김흥광은 광산 김씨의 시조이며 딸은 김유신의 내손 김경주와 혼인하였다.

 

신라 하대 가계도

46대 문성왕(839-857)은 신무왕과 정계부인의 아들이다. 845년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맞아들이려 했지만 중앙 귀족이 아닌 장보고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싫어한 중신의 반대로 하지 못하였다. 장보고는 846년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문성왕은 염장을 보내어 장보고를 암살했다. 847년 김안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852년 사망하여 숙부 김의정(헌안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말하고 857년 사망했다.

문성왕의 왕비 소명왕후는 두번쨰 왕후라 하며 김양의 딸이다. 아들 김안의 증손자 김억렴은 태조 왕건의 장인이기도 하고 후손 김부가 56대 경순왕이 되었다.

 

 

 

 

문성왕의 숙부인 김의정 헌안왕(857-861)이 4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김균정과 조명부인의 아들이자 신무왕 김우징의 이복동생이다. 860년 군신과의 연회 시에 왕족 김응렴(48대 경문왕)을 등용하여 장녀와 혼인을 시켰다. 3개월 후 861년 1월 병으로 쓰러지고 아들이 없자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선위하였다.

 

48대 왕인 경문왕(861-875) 김응렴은 헌안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김응렴은 43대왕 희강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계명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이다. 즉위 당시 16세였지만 친정을 하였다. 즉위 중반부터 호족의 반란과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으나 반란을 진압하였다.

경문왕의 왕비는 헌안왕의 딸 문의왕후 김씨로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김정은 49대 헌강왕이며, 차남 김황은 50대 정강왕, 장녀 김만은 51대 진성여왕이다. 헌안왕의 둘째 딸 또한 후비로 맞았으며 후궁 장씨는 장보고의 딸로 아들 궁예를 낳았다. 서자 궁예는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후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승려가 되었고, 이후 901년 후고구려를 세웠다.

 

49대 왕 헌강왕(875-886) 김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장남이다. 아버지 경문왕이 승하하고 875년 왕위에 올랐고, 879년까지 숙부 김위홍이 섭정하였고 이후 친정하였다. 불교와 학문의 장려에 노력하여 876년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설치하여 강의 및 토론을 하게 하였다. 884년 신라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했지만 일본과의 격전에서 물러났다. 왕비 의명부인에게 2녀를 두었는데 장녀 의성왕후는 53대 신덕왕의 왕비이며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의 모후이다. 차녀 계아태후는 김효정과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56대 경순왕이다. 후비 의명왕태후 김씨에게서 아들 김요를 두었는데 52대 효공왕이다.

 

 

 

50대 왕 정강왕(886-887) 김황은 헌강왕의 친동생이다. 헌강왕 사망 당시 태자 김요가 두돌이 안된 어린 나이라 숙부 김황이 왕위에 올랐다. 887년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병하여 김요를 죽였으나 그해 병을 얻어 쓰러졌다.

 

51대 여왕인 진성여왕(887-897)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딸로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즉위 후 1년간 숙부 김위홍이 대리청정하였고, 김위홍이 서거한 후 친정하다가 897년 조카인 헌강왕 아들 김요(효공왕)에게 선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이고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로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다. 여왕의 낭비로 국고가 비어 민심이 점차 흉흉해지자 민란과 도적이 일어났다.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웠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 부르며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쇠락해졌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며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후삼국시대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노력하였으나 897년 병으로 헌강왕의 서자 김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진성여왕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젊은 미남 두세명을 불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겼다고 하며, 거리에 국정을 비판하는 글이 붙을 정도로 민심이 흉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유모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 김위홍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어지럽혔다고 기록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이 사심 없고 욕심이 적으며 한가함을 좋아하였다 하며 굳은 의지를 지닌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위홍은 헌강왕, 진성여왕 형제자매들의 유모인 부호부인의 남편이었다. 진성여왕은 유모의 남편이자 숙부인 김위홍과 불륜 관계를 맺고 대궐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김위홍과 진성여왕이 정식혼인 관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신라 52대 효공왕(897-912) 김요는 헌강왕과 의명왕태후로 추존된 후궁 김씨의 아들이다. 889년 진성여왕에게 보위 계승자로 책립되었고 897년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받았다. 김요는 만14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지만 친정을 하였다.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있었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892년 견훤이 901년 궁예가 왕을 자칭하였고, 효공왕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주색에 빠졌다. 912년 승하하자 손윗처남이자 이복자형인 박경휘가 신라 신덕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오랫동안 김씨 왕조로 이어진 신라 왕은 다시 박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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