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백제 멸망시기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GoodFortune 2019. 9. 1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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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8대 혜왕(598-599)은 성왕의 차남으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598년 12월 왕위에 올랐으나 고령으로 바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백제왕조 가계도

 

백제 29대 법왕(599-600)은 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위덕왕 시절 백제의 장군으로 고구려군과 맞써 싸웠다. 불교를 숭상하여 사비에 미륵사를 짓게 하였다. 법왕도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안있어 사망하였다. 법왕의 아들은 30대왕 무왕과 서자인 진이왕이 있다. 무왕을 법왕의 친생자로 보지 않는 견해에서 무왕의 생부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진이왕이다. 일본 도요타 씨와 오우치 씨 가문의 15대 선조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일본 신찬성씨록과 도요타 씨와 오우치 씨 족보에 의하면 진이왕이 백제 무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 30대 무왕(600-641)은 이름은 부여장, 아명은 서동이다.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위덕왕의 서자라는 설도 존재한다.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된 그의 가계는 <삼국사기>에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중국의 구당서와 백제 유민들의 묘비석에는 부여관(진이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진이왕으로 나타난다.

무왕은 즉위 후 신라와 자주 충돌하여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 공격을 청하기도 했다. 수나라가 멸망하자 당나라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했다.

전북 익산에 미륵사와 궁궐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익산 천도를 위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하기도 했다.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전투 패배 후 동요된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서동요' 무왕

<삼국유사>에는 서동 출신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동요를 지어 부르게 하여 진평왕이 공주를 귀양보냈고, 귀양 길에 서동을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무왕이 왕비와 함께 행차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게 하였고,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짓는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여 미륵사를 짓도록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탁적덕(백제 대귀족)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전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가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라고 적혀있다.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백제 31대 의자왕(641-660)의 이름은 부여의자 이며 망국의 군주로 시호를 받지 못했다. 무왕의 장남으로 632년 왕태자로 책봉되었고 641년 무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642년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백제 장군 윤충이 옛 가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는 저차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품석이었는데 그의 아내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643년 고구려와 화친하여 함께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하여 백제의 7개 성을 다시 탈환하였지만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자 신라가 원군을 징발하였을 때 다시 신라의 7개 성을 빼앗았다.

648년 신라 김춘추는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당이 백제에게 신라로부터 뺴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 백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다. 653년 왜와 우호하고 왜국에 앵무새, 낙타, 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백제 계백 장군

 

백제는 655년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백제의 33개 성을 빼앗고, 659년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공격했다. 백제의 침공을 견디지 못한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한편 의자왕은 655년부터 사치와 향략을 즐기기 시작했다. 간하는 신하를 옥에 가두고 사치스러운 잔치를 즐겼다. 660년 신라는 당과 18만 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당 고종은 군사 13만을 보냈고 신라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5만 군사를 보내어 나당연합군에 백제는 무너졌다.

의자왕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에게 5천 군사를 주어 막게 했지만 백제군의 열배나 되는 신라군에 의해 계백은 죽고 그의 군사는 전멸했다. 신라군과 당병은 합류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향하였다. 사비성이 포위되자 백제는 소와 많은 음식을 당군에 보내고 백제 태자가 직접 당나라 소정방에게 나가 철군할것을 요청하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8월 24일 의자왕은 태자 융과 함꼐 웅진성으로 피난하였고 사비성에는 둘째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 항복했다. 얼마 못가 의자왕도 8월 29일 항복했다.

이후 당은 의자왕에게 전승축하연에서 술을 따르게 하고, 사비성을 약탈하며 젊고 건장한 백제인들을 살육하고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를 당의 치하에 두고 직접 지배하려 했다. 이는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의자왕은 왕자들과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그해 의자왕은 병으로 죽었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다며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지만,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은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 싸웠다고 하며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왕비 은고는 의자왕의 왕비이며 <일본서기>에만 기록이 있다.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뭍잡혀 당나라로 갔다고 한다. 장남 부여융은 644년 태자 책봉되었으나 의자왕 말년에 부여효로 교체되었다. 훗날  김법민(문무왕)에게 얼굴에 침을 맞으며 엎드리는 굴용을 당했는데,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누이 고타소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의 강성함으로 웅진도독부가 고립되자 부여융은 백제 땅으로 와 백제 부흥운동 토벌에 협조했다.664년 웅진도독에 임명되었고, 665년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 일부에 대한 지배를 허용하였다. 고구려가 멸망되며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다시 대립하게 되었고 672년 축출되었다.

 

의자왕 왕비 은고

의자왕의 차남 부여태는 백제 멸망시 사비성에 남아 왕이라 자처하며 항전했다. 백제 멸망 후 낙양으로 끌려간 후 행적은 기록에 없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효는 백제 멸망 당시 태자였다. 사비성이 포위되자 의자왕과 웅진으로 대피하였고, 항복한 후 낙양으로 끌려간 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은 백제 부흥군에 의해 백제왕 풍왕(660-663)으로 추대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서는 풍왕을 마지막 왕으로 보았다.

백제 멸망시 왕족이 당나라에 끌려가자 백제 부흥군들은 백제의 왕으로 부여풍을 추대했다. 일본에 있던 부여풍은 왜국의 원병과 함께 백제로 와서 왕위에 올랐으나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고구려로 도주했다.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나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그후 행적은 기록에 없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은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며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 패하자 왜로 망명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은 631년경 일본에 왔다가 백제 멸망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한다. 일본 정착 후 지토천왕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씨를 사성받고 해당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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