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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왕실 -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가

GoodFortune 2022. 10. 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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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1세

1426~1481 재위 1448~1481

노르웨이 국왕 재위 1450~1481

스웨덴 국왕 재위 1457~1464

 

올덴부르크 백작 디트리히와 홀슈타인의 하일비히의 아들로 태어났다. 1445년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와 결혼해 한스, 프레데리크 1세를 포함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448년 덴마트,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인 팔츠노이마르크트 왕가의 크리스토페르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덴마크 의회에 의해 덴마크의 국왕이 되었다. 크리스티안 1세가 왕위에 오르며 팔츠노이마르크트 왕조가 끝이나고 올덴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1450년 노르웨이 국왕, 1457년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스웨덴 칼마르 동맹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스웨덴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1464년에 스웨덴 왕위에서 물러났다.

 

 

한스

1455~1513 재위 1481~1513

노르웨이 국왕 재위 1483~1513

스웨덴 국왕(요한 2세) 재위 1497~1501

 

크리스티안 1세와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의 아들이다. 1478년 작센의 크리스티나와 결혼해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481년 아버지 크리스티안 1세 사망 후 덴마크의 왕위를 이었고, 1483년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1497년에 스웨덴의 요한 2세로 즉위했으나 1500년에 일어난 헤밍슈테트 전투에서 디트마르셴의 소작농들에게 패하며 스웨덴 왕위에서 퇴위당했다.

 

 

크리스티안 2세

1481~1559 재위 1513~1523 (덴마크 &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 재위 1520~1521

한스 국왕과 작센의 크리스티나의 아들이다.1513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3국의회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왕위 계승 권한을 이정받았지만 스웨덴은 연기되었다. 스웨덴에서는 자유 선거를 통해 스텐 스투레 덴 윙레가 이끄는 스웨덴 민족주의 진영과 웁살라 대주교를 역임하는 구스타브 트롤레의 친덴마크 진영이 대립중이었는데, 1520년 스텐 스투레 덴 윙레를 숙청시키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1523년 월란 반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삼촌인 홀슈타인의 프레데리크 공작(프레데리크 1세)에게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위를 넘겨줬다. 1531년 복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532년 프레데리크 1세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감금생활을 하다 1559년 사망했다.

 

 

프레데리크 1세

1471~1533 재위 1523~1533

크리스티안 1세와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의 아들로 한스의 동생이다. 1513년 한스 국왕이 사망하면서 윌란 반도 출신 귀족들에게 덴마크의 국왕으로 추대되었지만 거절하였다. 1523년 조카인 크리스티안 2세가 퇴위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1502년 브란덴부르크의 안나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리스티안 3세

1503~1559 재위 1534~1559

프레데리크 1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의 아들이다.

1525년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왕세자 시절 마르틴루터의 종교 개혁, 루터교에 관심이 많았다. 153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들과 귀족들은 그를 덴마크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덴부르크의 크리스토페르 백작이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주장하였고, 덴마크 의회는 크리스토페르 백작을 지지했다.

1534년~1536년 개신교 세력과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백작 전쟁)이 일어났다. 올덴부르크의 크리스토페르 백작이 항복을 선언하며 종식되었고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 왕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개신교 세력이 확장하게 되었다. 1536년 루터교 규약을 덴마크 의회가 수용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개신교 정책을 시행했다.

 

 

 

프레데리크 2세

1534~1588 재위 1559~1588

크리스티안 3세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의 아들이다. 1563년 북방 7년 전쟁에서 스웨덴을 정복하려 했지만 사촌인 스웨덴 에리크 14세에게 패하였다. 스웨덴인들이 스코네를 약탈하고 덴마크는 한동안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성격이 급하고 허영심이 많았지만 용기있는 야심가로 기록된다. 사냥, 와인, 여자, 축제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군주로 여겨진다.

1572년 사촌 메클렌부르크의 조피와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차녀 앤은 제임스 6세(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의 왕비가 되었고, 장남 크리스티안 4세가 왕위를 이었다.

 

 

크리스티안 4세

1577~1648 재위 1588~1648

 

프레데리크 2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조피의 장남이다. 프레데리크 2세가 사망했을 당시 11살이었기에 추밀원이 국정을 수행했다. 1596년 대관식을 거행하고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1611~1613 스웨덴과 칼마르 전쟁에 승리하였고, 발트 해 지배권을 얻었다. 30년 전쟁 중 1625년 덴마크 군대를 파견해였지만 신성 로마제국 군대에게 패하였고, 1643~1645년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스웨덴에 패하면서 발트 해 지배권을 다시 잃었다.

첫 부인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와 결혼해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두번째 아내 평민 출신 키르스텐 뭉크와 결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프레데리크 3세

1609~1670 재위 1648~1670

 

크리스티안 4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의 차남이다. 왕세자인 형 크리스티안이 1647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며 1648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다. 1657~58년 스웨덴과 전쟁하였지만 패하였고 1659년 수도 코펜하겐을 점령당하였지만 네덜란드의 지원을 통해 버텨냈고, 이후 1658~1660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1643년 브라운슈바이크뤠니부르크의 조피 아말리에와 결혼해 3남5녀를 낳았다. 장녀 안나 소피에는 작센 선제후비, 3녀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는 팔츠 선제후비, 4녀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3남 요르겐은 잉글랜드 앤 여왕의 남편이다.

프레데리크 3세는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1660년에 선거군주제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를 도입하게 되며 1848년 헌법 개정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670년 사망하며 아들 크리스티안 5세가 왕위를 이었다.

 

 

크리스티안 5세

1646~1699 재위 1670~1699

 

1675~79년에 스코네 전쟁을 통해 스웨덴이 차지하고 있던 스코네 탈환을 시도했지만 패전하게 되며 경제적 부담을 안았다. 아버지의 절대군주제를 발전시켜 평민들을 공무에 참여시키고 귀족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덴마크 최초의 법전 <단스케 로브>를 편찬하였다.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아말리에와 결혼해 5남 2녀를 두었으며 1699년 사냥 도중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며 장남 프레데리크 4세가 왕위를 이었다.

 

 

프레데리크 4세

1671~1730 재위 1699~1730

크리스티안 5세와 첫 부인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아말리에의 아들이다. 1700~1721년 대북방 전쟁에서 덴마크군을 지휘하다. 1721년 작센 선제후국과 함께 스웨덴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패하였다.대북방 전쟁에서는 승리하여 홀슈타인고트로프 공국이 소멸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탈환하였다.

1695년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프의 루이제와 결혼해 5명의 자녀를 낳았고, 1703년 피레크의 엘리자베트 헬레네와 중혼을 해서 1명의 자녀를 두었다. 1712년 안나 소피 레벤틀로브와 재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1711년 페스트 유행, 1728년 대화재가 일어나 큰 재난을 겪었다.

 

 

 

 

크리스티안 6세

1699~1746

재위 1730~1746 (노르웨이의 국왕 재위 1699~1746)

 

프레데리크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루이제의 차남이다. 1730년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크리스티안 6세는 경건주의에 입각한 엄격하고 보수적인 정치를 했기에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했다. 크리스티안스보르 성, 히르슈홀름 궁전 등 호화로운 건축물들을 남겼는데 국민들에게 부담이 되기도 했다.

덴마크 크리스티안스보르성 - 1794년 1884년 화재로 인해 1907~1928년 재건되었다.

 

프레데리크 5세

1723~1746 재위 1746~1766

 

크리스티안 6세와 조피 막달레네의 장남이다. 1746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보수적인 아버지와 달리 자유로운 통치를 했다. 첫 번째 왕비 잉글랜드의 조지 2세의 딸 루이세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요절하고 차남 크리스티안 7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장녀 소피아 막달레나는 구스타브 3세와 결혼하여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루이세가 사망하자 프레데리크 5세는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어 여러 대신들이 국정을 대신하였다. 두번째 왕비 브라운슈바이크의 율리아네 마리로 부터 1남 프레데리크를 낳았다. 프레데리크의 아들 크리스티안 8세는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된다.

 

 

크리스티안 7세

1749~1808 재위 1766~1808

 

프레데리크 5세와 잉글랜드의 루이세의 차남이다. 1766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위에 올랐고,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의 유복자이자 잉글랜드 조지 2세의 손녀인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했다.(두 사람은 사촌지간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안 7세는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애인 안나 카테리네 벤타겐이 있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영국과 프랑스 등을 순회하며 독일 출신 의사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대동했는데 그는 훗날 크리스티안의 주치의가 된다. 슈트루엔제는 왕비와도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다.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질환이 심해지며 자신이 프레데리크 5세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폭력적 성향이 갈수록 심해지자 계모 율리아네 마리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 슈트루엔제는 처형되었고,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는 유폐되었다.

 

 

프레데리크 6세

1768~1839 재위 1808~1839 

 

크리스티안 7세와 그레이트브리튼의 캐롤라인 마틸다의 아들이다. 아버지 크리스티안 7세가 정신질환이 있었기에 섭정이 국정을 대신해야 했다. 1772년 프레데리크 6세는 어렸기에 삼촌인 프레데리크가 섭정이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 율리아나 마리아가 실권을 행사했다.

1784년에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이 되어 국정을 살폈다.

1790년 헤센카셀의 마리 조피와 결혼해 8명의 자녀를 두었고 1808년 아버지 사망 후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위에 올랐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덴마크가 프랑스에 패하며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잃었고 노르웨이의 왕위에서 물러났다. 아들 없이 사망하며 왕위는 사촌인 크리스티안 8세가 이어받았다.

 

크리스티안 7세 - 프레데리크 6세 - 크리스티안 8세

 

크리스티안 8세

1786~1848 재위 1839~1848

크리스티안 7세의 동생 프레데리크 왕자와 메클렌부르크슈메린의 소피아 프레데리카의 아들이다.

1806년 사촌인 샤를로테 프레데리카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은 요절했다. 4년 후 이혼하였고 1815년 카롤리네 아말리에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외 혼외자를 10명 두었다.

1814년 노르웨이 왕국 섭정이 되었다가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으나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패하며 왕위에서 물러나 덴마크로 돌아왔다. 사촌형인 프레데리크 6세가 죽자 1839년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

크리스티안 8세는 왕권전제화를 준비하면서 입헌군자파와 큰 갈등을 빚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 혁명이 일어날 시기에 패혈증으로 급사했다.

 

 

프레데리크 7세 

1808~1863 재위 1848~1863

 

크리스티안 8세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샤를로테 프레데리카 공작부인의 아들이다.

1828년 프레데리크 6세의 딸 빌헬미네 마리 공주와 결혼했으나 6년 후 별거를 했고 1837년 이혼을 했다.

1841년 메클렌부르크의 카롤리네 마리아네와 결혼했지만 5년 후 두번째 이혼을 했고, 1850년 평민 출신 발레리나 루이세 크리스티나 라스무센과 결혼했으나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세번의 결혼에도 프레데리크는 자녀가 없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은 덴마크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했고, 1848~1851년 제 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시작되었다. 1849년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덴마크 헌법이 승인되고 1852년 글뤽스부르크 출신의 크리스티안을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1863년 사망하며 크리스티안 9세가 왕위에 올라 올덴부르크 왕가는 끝이 나고 글뤽스부르크 왕가가 시작된다.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현재 여왕 마르그레테 2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의 자손들이 유럽 각국의 국왕자리에 오르며 크리스티안 9세는 유럽의 할아버지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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