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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실 - 에리스트센(에스트리드) 왕가 가계도

GoodFortune 2022. 10. 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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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실의 역대 왕조는 아래와 같은 순서이다.

 

고름 왕조 - 에스트리센 왕조 - 칼마르 연합 - 올덴부르크 왕조 - 글뤽스부르크 왕조

현재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글뤽스부르크 왕조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에스트리센 왕조의 왕가에 대한 가계도를 정리했다.

 

스벤 2세 (스베인 아스트리다르손)

1019~1076 재위 1047~1076

 

올프 야를과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스벤 1세의 딸)의 아들이다. 크누드 대왕의 외조카이기도 한다.

스벤 2세 이전의 덴마크 왕조는 고름 왕조이며 스벤 2세부터는 에리스트센(에스트리드) 왕조이다.

 

1026년 아버지 울프 야를이 크누드 대왕의 명으로 살해당하자 스웨덴으로 달아나 지냈다. 

1042년 크누트 3세(하르다크누트) 사망 후 덴마크의 왕위를 주장하였다. 노르웨이, 덴마크의 망누스 1세와 전쟁을 벌였고 1047년 망누스 1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047년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다.

1076년 사망 이후 아들 하랄 3세(노르웨이의 하랄 3세와 다른 인물이다)가 왕위를 이어갔다.

그는 20여 명의 자식을 두었고 아들 중 5명이 (하랄 3세, 크누드 4세, 올라프 1세, 에리크 1세, 닐스)이 덴마크의 왕위에 앉으며 왕들의 아버지라 불린다.

 

 

하랄 3세

1040~1080 재위 1076~1080

 

스벤 2세의 아들이다.1076년 스벤 2세가 사망하면서 셸란섬 의회는 회의를 열어 하랄 3세를 왕위에 올렸다. 재위 기간 동안 평화를 중시하여 숫돌왕 하랄 이라는 별명이 있다. 사촌인 마르가레타 하스비에른스다테르와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사망하며 크누드 4세가 왕위를 이었다.

 

 

크누드 4세

1042~1086 재위 1080~1086

 

스벤 2세의 아들이다. 스벤 2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덴마크 국왕 최초로 기독교 세계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1086년 오덴세에서 반대파에 의해 피살 당하였고 왕위는 동생 올라프 1세가 이어갔다.

 

 

올라프 1세

1050~1095 재위 1084~1095

 

스벤 2세의 아들이다.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딸 잉에예르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1086년 크누드 4세가 살해당하며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095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이복동생 에리크 1세가 왕위를 이었다.

 

 

에리크 1세

1060~1103 재위 1095~1103

 

스벤 2세의 아들이다. 이복형 크누드 4세를 지지하였지만 이후 반란에 가담하였다. 반란으로 크누드 4세가 오덴세에게 살해당하였고, 올라프 1세가 즉위했지만 재위 기간이 짧았다.

1095년 덴마크 의회는 에리크 1세를 덴마크의 국왕으로 추대했다. 왕비 보딜 투르고트스도테르와 함께 여행 도중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보딜과의 사이에서 크누드 라바르를 낳았으나 1131년 스웨덴의 망누스 1세에게 살해당하였고, 손자인 발데마르는 1146년 덴마크의 국왕이 된다. 

 

닐스

1065~1134 재위 1104~1134

 

스벤 2세의 사생아이다. 1103년 에리크 1세 국왕이 순례 도중 사망하여 1104년 왕위에 올랐다. 스웨덴 잉에 1세의 딸 마르가르타 프레드쿨라와 결혼하여 망누스를 낳았다. 망누스는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된다.

왕비 사망 후 스웨덴의 잉에 2세, 스베르케르 1세와 결혼했던 울브힐드 호콘스도테르와 결혼하였다.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 결정 과정에서 망누스를 지지하고자 크누드 라바르를 살해하였다.

1134년 포테비크 전투에서 패하였고 같은 해 슐레스비히에서 살해당하였다. 왕위는 크누드 라바르의 이복형제 에리크 2세가 이어갔다.

 

 

에리크 2세

1090~1137 재위 1134~1137

 

에리크 1세의 사생아이다. 1131년 이복형 크누드 라바르가 암살된 이후 닐스 국왕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였고 스코네에서 대립왕으로 즉위하였다. 닐스 국왕과 그의 아들 스웨덴의 망누스 1세와의 전투에서 몇차례 패하였고 스코네로 도망가기도 했다. 1134년 포테비크 전투에서 독일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닐스를 물리쳤고, 닐스는 그해 사망하였다. 1134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한였으나 1137년 지방 귀족 소르테 플로우에게 살해당하였다. 왕위는 조카인 에리크 3세에게로 이어졌다. 키예프의 말름프레드와 결혼하였고, 투나라는 여인으로부터 사생아 스벤을 두었다.

 

 

에리크 3세

1120~1146 재위 1137~1146

 

덴마크 귀족 하콘 수니바손과 에리크 1세의 딸 랑힐의 아들이다. 1137년 에리크 2세가 살해당하여 덴마크위 왕위에 올랐다. 사촌인 올라프 하랄센이 스코네에서 권력을 잡으며 에리크 3세와 대립하였고, 1141년 전쟁에 이겨 올라프는 사망하였다.

1144년 노르트마르크의 루돌프 1세의 딸인 잘츠베델의 루트가르트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1146년 퇴위당하였는데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후계 없이 사망 후 발데마르 1세, 스벤 3세, 크누드 5세의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발데마르 1세

1131~1182 재위 1146~1182

 

크누드 라바르 공작과 키예프의 잉에보르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발데마르가 태어나기 전 닐스에게 살해당하였다.

1146년 덴마트의 에리크 3세가 퇴위하며 왕위 계승 후보자들 간에 내전이 일어났다. 1157년 발데마르 1세는 에리크 2세의 아들인 스벤 3세, 망누스 1세의 아들 크누드 5세와 덴마크를 3등분 하기로 합의했다. 1157년 스벤 3세의 대연회 자리에서 음모로 크누드 5세가 살해당하였고 발데마르 1세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윌란 반도로 갔다. 발데마르 1세는 스벤 3세의 군대에 대항해 승리하였고 스벤 3세를 살해했다. 스벤 3세와 크누드 5세의 사망으로 발데마르 1세는 덴마크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크누드 5세의 이복자매인 민스크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크누드 6세, 발데마르 2세 등을 낳았다.

 

 

스벤 3세

1125~1157 재위 1146~1157

 

에리크 2세와 투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이다. 1130년 아버지 에리크 2세가 덴마크 왕권을 놓고 닐스와 전쟁을 벌일때 아버지를 지원하였다. 1137년 에리크 2세 사망 후 사촌인 에리크 3세가 덴마크 왕위에 올랐고, 스벤은 독일의 콘트라3세의 손에 자라게 된다. 1146년 에리크 3세가 퇴위하며 스벤은 셸란섬의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아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1157년 덴마크를 3분할 하기로 합의를 한 후 스벤 3세는 스코네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다른 두명의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에서 크누드 5세는 살해하였으나 발데마르 1세에게 패하여 사망하였다.

1152년 마이센의 콘라트의 딸 아델라와 결혼해 2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누드 5세

1129~1157 재위 1146~1157

 

스웨덴 망누스 1세와 폴란드의 리헤자 사이의 아들이다. 1146년 에리크 3세가 퇴위한 후 윌란 반도의 유력자들은 크누드를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했다.  발데마르 1세, 스벤 3세와의 내전에서 패하여 1150년에 스웨덴으로 망명하였고 1154년 덴마크로 귀환했다. 1157년 스벤 3세의 살해 음모로 인해 사망하였다. 1156년 스웨덴의 헬리나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크누드 6세

1163~1202 재위 1182~1202

 

발데마르 1세와 민스크의 소피아의 장남이다. 1182년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스코네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의 반란을 진압하여 체포하였고, 홀슈타인의 아돌프 3세 백작의 반란은 동생 발데마르 공작에 의해 체포되었다.

작센의 하인리히 사자공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고, 사망 후 동생 발데마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발데마르 2세

1170~1241 재위 1202~1241

 

발데마르 1세와 민스크의 소피아의 차남이다. 재위 기간 동안 덴마크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승리왕, 정복왕으로 불린다. 1182년 12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에 의해 남윌란 공작에 임명되었다. 1193년 발데마르 크누드센 주교가 크누드 6세 국왕에 대한 반란으로 체포되었고, 1201년에는 홀슈타인의 아돌프 3세 백작이 반란을 일으켰다. 스텔라우 전투에서 승리한 남윌란 발데마르 공작은 아돌프 3세 백작을 포로로 잡은 뒤 감금시켰다.

1202년 크누드 6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발데마르 2세는 뤼베크, 홀슈타인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1205년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1세 국왕의 딸 다그마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왕세자가 되었으나 1231년 사냥에서 사망하였다.

1214년 플랑드르와 친선을 맺기 위해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고, 그해 슈타데를 정복하였고 1216년 함부르크를 정복했다. 1219년에 에스토니아를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1232년 두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에리크 4세를 공동왕위로 임명하여 1241년 사망 전까지 공동 군주로 있었다.

 

 

에리크 4세

1216~1250 재위 1232~1250

 

발데마르 2세와 두번째 아네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의 아들이다. 1218년 이복형 발데마르가 왕세자로 임명되며 에리크는 슐레스비히 공작에 임명되었으나 왕세자 발데마르는 1231년 사망했다. 1232년 에리크는 아버지 발데마르 2세와 함께 공동왕위에 올랐으며 슐레스비히 공작은 동생 아벨에게 넘겨줬다. 1239년 작센의 유타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241년 아버지 사망 후 단독 왕이 되었다. 

재위 귀간 동안 아벨과 계속하여 분쟁하였다. 1246년 홀슈타인을 침공하며 다시 아벨과 분쟁하게 된다. 아벨은 홀슈타인 침공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윌란반도를 장악하여 귀족들과 대항하였다. 1250년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이 에리크 4세를 초대하였고 에리크 4세는 가던 도중 암살당했다. 아벨은 24명의 귀족과 함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덴마크의 왕위에 올랐다. 

 

 

아벨

1218~1252 재위 1250~1252

 

발데마르 2세와 두번째 아네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의 아들이다. 형 에리크가 발데마르 2세와 함께 공동 군주로 즉위하며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237년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 백작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241년 아버지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며 형이 에리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아벨은 슐레스비히의 독립을 주장하여 에리크 4세와 대립하였는데 1250년 그들의 여동생인 소피가 중재하며 멈추게 되었다.

1250년 에리크 4세가 슐레스비히의 아벨의 관저로 초대받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아벨은 24명의 귀족과 함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고 덴마크의 왕위에 올랐다. 1252년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아벨은 수레바퀴 제조인 헤네르에게 살해당하였고 아벨의 아들 발데마르가 퀼른 대주교의 인질로 붙잡혀 있었기에 동생 크리스토페르 1세가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

 

 

크리스토페르 1세

1219~1259 재위 1252~1259

 

발데마르 2세와 두번째 아네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의 아들이다. 1248년 마르가레테 삼비리아와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1252년 형 아벨이 살해당하며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아벨이 에리크 4세를 살해했음을 밝혔고, 아벨의 후손들은 덴마크 왕위 계승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253년 내전을 피하기 위해 아벨의 아들 발데마르 아벨쇤을 슐레스비히 공작(발데마르 3세)로 임명하였다. 아벨의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야코브 아를란센 룬드 대주교와 대립하였으며 크리스토페르 1세가 교회에 세즘을 부과하자 야코브 대주교는 이를 거부하고 교회의 농민들에게 국왕에 대한 봉사를 금지시켰다. 1256년 1258년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1259년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사망했다.

 

 

에리크 5세

1249~1286 재위 1259~1286

 

크리스토페르 1세와 마르가레테 삼비리아의 아들이다. 1259년 크리스토페르 1세가 암살된 후 10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며 어머니 마르가레테가 섭정이 되었다. 에리크 5세의 퇴위를 요구했던 야코브 에를란센 대주교, 남윌란의 발데마르 공작과 싸웠으나 발데마르 공작이 승리하며 마르가레테와 에리크 5세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덴마크 왕실은 윌란 반도 남부의 재산을 발데마르 공작에게 양도하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1286년 윌란 반도에서 귀족들에게 살해되었는데, 1282년 귀족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덴마크 왕실 헌장을 채택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왕위는 아들 에리크 6세에게 이여졌다.

 

 

에리크 6세

1274~1319 재위 1286~1319

 

에리크 5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아그네스의 아들이다. 1286년 아버지 에리크 5세가 암살된 후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1294년까지 어머니 아그네스가 섭정을 하였다. 

1294년 에리크 6세의 퇴위를 요구한 옌스 그란 룬드 대주교를 체포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을 탈출하였고 로마 교황청에 진정을 하였다. 이 일로 에리크 6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재위 기간 대회와 유흥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며 농민과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1312년 농민, 교회,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1319년 덴마크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스웨덴의 잉에보리 망누스도테르와 결혼해 1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요절하거나 유산되었기에 왕위는 동생 크리스토페르 2세에게 이어졌다.

 

 

크리스토페르 2세

1276~1332 재위 1320~1326 1330~1332

 

에리크 5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아그네스의 아들이다. 형 에리크 6세의 반대파였으며 1319년 에리크 6세가 사망할 때까지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1320년 귀족들에 의해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실권은 가지지 못한 왕이었다.

1326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퇴위당하며 또다시 망명 생활을 해야했고 홀슈타인의 게르하르트 3세는 조카인 발데마르 3세를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스스로 섭정을 하였다. 1329년 덴마크의 왕위로 복위했지만 실권 없이 왕위에 있다가 1331년 퇴위 당한 후 롤란섬의 올홀름에 감금되었다가 사망하였다.

 

 

발데마르 3세

1314~1364 재위 1326~1329

 

슐레스비 공작 에리크 2세와 홀슈타인렌츠부르크 아델하이트의 아들이다. 슐레스비의 공작으로는 발데마르 5세이다.

먼 친척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토페르 2세가 퇴위당하면서 12세의 나이에 발데마르 3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삼촌인 게르하르트 3세가 섭정이 되었다. 1328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1329년 윌란반도의 농민 봉기로 퇴위당하였고 크리스토페르 2세가 왕위에 복위하였다. 발데마르 3세는 슐레스비 공작으로 복위하였으며 그의 누나 헬비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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