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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50

중종의 왕비들과 대윤 소윤의 갈등

중종 (조선 11대 임금) 1488-1544 재위 1506-1544 중종은 성종의 2남이며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다. 성종25년(1494)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년 중추부지사 박원종, 이조참판 성희안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에 추대되어 조선 11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폐륜과 사대부 부녀자 농락으로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을 중심으로 훈구세력들의 연산군 폐위 움직임이 일어났고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경복궁으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다음날 9월 2일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예종의 짧은 1년 3개월 후 성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예종 1450-1469 재위 1468-1469 세조14년 (1468) 9월초 7월부터 몸이 약해진 세조는 9월이 되자 위독해졌다. 7월 19일 고령군 신숙주, 능성군 구치관, 상당군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의 핵심 인물을 불러들여 세자 이황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공신들은 세조에게 곧 일어날 수 있다며 전위를 반대했다. 공신들과 세자 사이에는 합의가 이루어짐이 없었기에 공신들은 세조 사후의 체제에 대한 방안이 필요했다. 세자는 전위하지 않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고령군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 이준 등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라고 명했다. 신숙주와 이준은 구공신과 신공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구공신은 김종서 등을 제거한 정난공신과 세조를 즉위시킨 좌익공신들이고, 신공신은 이시애..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과 강빈옥사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왕비는 인렬왕후 한씨와 계비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가 있다. 인렬왕후는 1610년 인조가 능양군일 때 결혼해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되자 30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그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을 낳았다. 인조13년(1635) 42세에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조는 계비를 맞이했는데,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인조16년(1638) 왕비에 책봉되었다. 후사는 없었으나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효종이 즉위하자 후에 자의대비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비인 인선대비가 죽었을 때 복상문제가 생기는데 이때 각각 서인과 남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인조의 후궁이었던 귀인 조..

인조반정 후 왕위에 오른 인조

인조 1595-1649 재위 1623-1649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선조의 가계도로 보면 인빈 김씨의 3남이 정원군이고 후에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1623년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등 서인의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은 중종과 인조인데, 중종은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고, 인조는 왕이 되고자 직접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는데 피신 중에 태어났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과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부..

태종의 아들들 양녕대군 효령대군 성녕대군

양녕대군 1394-1462 양녕대군은 1394년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양녕대군의 부인은 광신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태종은 원경왕후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 김씨 등 18명의 후궁에게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양녕대군은 태조3년(1394)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방원은 정안대군이었다. 제 1, 2차 왕자의 난을 겪고 이방원이 조선 3대 임금으로 오르자 정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양녕대군은 태종을 이어 조선 4대의 임금이 될 행운을 갖게 된다. 양녕대군은 태종2년(1402) 원자에 책봉되었고, 태종4년(1404) 10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3세에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고, 왕세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나갔다. 그러나 성..

단종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들

단종은 세조 3년 영월에서 자살을 강요당하여 목을 매어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14일 승하한 후, 18일에 단종 이홍위가 경복궁 근정문에서 즉위했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으나 세종 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 현덕왕후 권씨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종을 낳고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 권씨 대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세자를 키웠으나 후궁은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다.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단종을 보좌하는 비상 체제가 선언되었다. 36세의 수양대군 뿐 아니라 7명의 대군들이 생존해 있었다. 이때 분경 금지 조항이 선언되었는데 분경..

문종은 어떻게 재위 3년만에 세상을 떠났을까.

문종 2년(1452) 5월 3일 어의가 문종의 허리 위에 종기가 났다고 알려주어 대신들은 문종에게 잠시 정사를 쉬라고 권유했다. 종기에는 안정이 제일이므로 잠시 국사를 놓고, 둘째 동생 안평대군을 대자암에 보내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5월 5일 문종의 환후를 살피는 당대 최고의 명의 전순의는 종기난 곳에 농즙이 흘러나왔고 콩죽을 드셨으니 괜찮다 하였고, 전순의의 진단을 믿었다. 단종실록에서는 전순의에 대해 "계통이 본래 용렬하고 천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전순의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 22년 6월 금성대군의 병을 낳게 하는데 일조했던 일로 나온다. 전순의를 신뢰한 세종은 그에게 일본의 의술을 배울 기회도 제공했고, 조선 제일의 명의로 자리잡았다. 세종 27년에는 내의원의 대표 어의가..

한명회와 그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부는 한상질로 조선 개국공신이며, 부친은 한기이다. 한명회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는데 번번히 낙방하자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2) 음보 경덕궁직을 얻었다.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고, 수양대군에게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한명회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고, 일찍 죽었다. 한명회의 네 딸들은 모두 좋은 집안으로 출가하는데 첫째 딸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시켜 왕실과 인연을 맺었고 둘째 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을 ..

사도세자 장조왕비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 그리고 한중록의 작자로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을 방조하여 냉혹하다는 평과, 정조와 같이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좋은 어머니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갖고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그런 남편을 견디면서 아들을 잘 키워낸 것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반대의견으로는 한중록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1년 한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봉한, 어머니는 이씨 부인이다.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는 당대 노록을 대표하던 명문 가문이었다. 노론이라는 가문 배경은 홍씨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노론은 서인에서 파생된 당파로, 선조 대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

선조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폐위와 인조반정

인목왕후 김씨는 조선 3대 궁중문학의 하나인 계축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계축일기는 서궁에 갇힌 인목왕후 김씨가 광해군에게 갖은 핍박과 설움을 받다가 인조반정으로 해방을 맞는 과정을 그렸다. 친정아버지, 동생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 영창대군까지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계축일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인목왕후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감상적이고 강직하기보다는 유약한 인물이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부인인 왕비에게 죽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목왕후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성품이 유약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되어있다. 부인인 노씨 부인은 선조 17년에 인목왕후 김씨를 낳았고, 김제남은 당시 10년이 넘도록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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