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개혁으로 시작했지만 술과 남색에 빠진 고려 공민왕

GoodFortune 2019. 8. 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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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고려 31대 왕)

1330-1374

재위 1351-1374

 

공민왕은 1330년 고려 27대 왕 충숙왕과 고려 출신 공원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28대 왕 충혜왕의 동복동생이다. 원나라 황실 출신은아니었지만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몽골에 입조하게 되었고 1341년(충혜왕 복위2)에 원나라에 갔다. 1344년(충목왕 원년)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1)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충혜왕에게는 아들 충목왕과 충정왕과 서자 왕석기가 있었다. 석기는 충혜왕 사후 은천옹주가 폐출되면서 처형되었고, 충목왕과 충정왕은 후사가 없었다. 충정왕의 생모인 희비 윤씨의 외척들이 덕녕공주의 섭정에 반발하고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자 1351년 원나라 황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이 노국대장공주와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조카인 충정왕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신의 노국공주

 

 

공민왕이 재위하면서 고려에서는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고, 노국대장공주는 이런 공민왕을 지지했다. 공민왕은 가장 먼저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페지했다.

 

1352년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기원과 최덕림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공민왕을 협박하고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하도록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조일신은 한달뒤 최화상과 장승량을 죽이며 조일신이 정권을 독차지했다.

 

 

 

공민왕은 기회를 엿보다가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였다. 그의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등 28명을 하옥하고 조일신을 제거했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하여 개혁정권 수립을 하였다.

 

당시 원나라에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혼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1354년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요청으로 원나라에 고려종정군을 파병하였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국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5)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철과 권겸, 노정 등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 이라 한다.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체로 환원하고 원나라의 정동행성을 폐지했다. 그리고 100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의 공격을 명령했다. 당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었고, 이자춘 부자는 고려 정계에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그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원나라 8참을 공격하고,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는데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이었다.

 

1358년부터 왜구의 침략과 홍건적의 침략이 계속되었으나 고려군은 이를 막아냈고, 1362년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가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쌍성총관부의 잔당은 완전히 몰락했다.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폐출하고 덕흥군(충선왕의 서자)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 김용이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덕흥군은 원나라 지원을 받아 원나라군 1만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을 침략하였으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패하였다. 원나라는 다음해에도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이성계와 최영의 고려군에 의해 패하였다.

계속된 홍건적과 왜구의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고려 공민왕 가계도

 

공민왕은 1비인 노국대장공주는 원 순종의 손자인 위왕의 딸로 남편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도왔고, 공민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노국대장공주는 한번 유산이 되었고, 이후 또 다시 아이를 가졌으나 1365년 난산으로 죽었다.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고 그녀가 죽고 얼마 후 정치권을 신돈에게 양보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술과 여색으로 지냈다. 이후에 신돈을 등용하고, 후비들이 들어왔고 후사를 만들겠다며 후비들을 강간하는 자제위도 만들었다.

2비는 계림부원군 이제현의 딸 혜비 이씨이다.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대신들이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였고, 1359년(공민왕8) 왕비로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 또한 후비 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막상 혜비가 들어오자 질투를 느끼고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1374년(공민왕23) 공민왕 시해 후에 여승이 되어 정업원(청룡사)으로 들어갔다. 그 후 1408년(태종8)까지 정업원 주지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신돈'의 익비 한씨

3비는 익비 한씨로 왕족이었다. 현종과 원혜왕후의 아들 평양공 왕기의 13대손인 덕풍군 왕의의 딸이다. 1367년(공민왕16)에 책봉되었다. 1372년(공민왕21) 공민왕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뽑아 설치한 자제위 소속의 한안, 홍륜 등을 시켜 자신의 후비들을 강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을 자신의 소생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시 익비 한씨는 공민왕이 칼로 위협하여 관계를 가졌고 임신까지 하였으나 혜비 이씨와 정비 안씨, 신비 염씨는 그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후에도 자제위의 한안, 홍륜 등은 왕명을 빙자하여 익비와 관계를 가졌다. 1374년(공민왕23)에 홍륜의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공민왕은 아이의 생부인 홍륜을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일을 알게 된 홍륜은 공민왕을 시해했다. 익비는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1376년(우왕2)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살해되었다.

4비는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 신비 염씨이다. 1371년(공민왕20)에 왕비 책봉되었다. 공민왕 시해후 여승이 되었으며 그 후의 기록은 없다.

5비는 죽성군 안극인의 딸 정빈 안씨이다. 1366년(공민왕15) 왕비로 간택되었다. 아버지 안극인이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 관련 중지를 공민왕에게 건의한 일로 파직되면서 궁에서 쫓겨났으나 얼마뒤 다시 입궁했다. 공민왕 시해 후 비구니가 되었고, 동생 안숙로의 딸을 우왕의 현비로 들인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자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비 안씨는 조민수와 이색의 주청을 받아 창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내렸다. 1년 후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것을 강요하자 교서를 또다시 선포했다. 또한 1392년 이성계가 새 왕조의 창업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자 이성계의 옹립 교서를 선포하고 국새를 이성계에게 넘겨주었다. 정빈 안씨는 이후 1428년(세종10)까지 살다가 사망했다.

 

6비는 순정왕후 한씨로 궁인이었다. 1357년(공민왕6)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1371년 공민왕의 서자였던 모니노의 법모로 포고되었다.

7비는 시비 반야로 신돈의 노비출신이었다. 1365년(공민왕14)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우왕)를 낳은 반야는 노비출신이었기에 공민왕은 아들 모니노의 혈통 시비를 걱정하여 1371년(공민왕20)에 모니노를 궁인 한씨(순정왕후)의 자식이라고 선언하였다. 우왕 즉위 후 1376년(우왕2) 반야는 우왕이 자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다가 명덕태후(충숙왕 왕비, 공민왕 모후)와 이인임 등에 의해 임진강에 수장되었다. 이후 이 사실은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구실이 되었는데 그들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 신씨설을 주장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이므로 이 내용이 사실인지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신돈

 

공민왕은 1365년 신돈을 등용하였는데,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다. 신돈의 어머니는 절의 노비였는데 공민왕은 직접 신돈을 찾아가 대담하였으며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366년(공민왕15)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신돈은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고,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었고, 신돈의 정책에 반발했다.

 

 

1371년 신해환국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됐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은 개혁의지를 잃었다. 1372년 자제위를 설치하여 청년들의 시중을 받기도 했다.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도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이 기록하였기에 왜곡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자제위의 홍윤이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와 간통하여 공민왕이 홍윤을 죽이려고 했고, 홍윤 일파가 공민왕을 살해한 일은 사실로 남아있다.

 

공민왕을 시해한 쿠데타 세력은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했는데 이인임이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사건의 진상을 알았으며 홍윤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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