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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업적 가계도 후손들

GoodFortune 2022. 10. 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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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1771~1821 프랑스 황제 재위 1804~1814

 

우리가 편히 부르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1세를 말한다.

카를로 보나파르트와 레티차의 아들로 8명의 자녀 중 둘째였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하급 귀족 가문으로 조상대대로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법률가 가문이었다. 아버지 카롤로 보나파르트 또한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이었다.

9살이 되던 해 형 조제프와 함께 프랑스 오탱에 있는 수도원 부속 종교학교에 입학했다. 4개월 후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항하였고 1784년 파리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나폴레옹은 4년 교육과정을 11개월만에 조기졸업하였다고 한다.

이후 포병장교 임용시험에 합격하였 1785년 포병장교로 부임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봉건제가 폐지되고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는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의용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1793년 마르세유에 정착한 나폴레옹은 상인 집안 딸 클라리 가와 친해지며 형 조제프가 클라라 가의 마리 줄리와 결혼하였고, 나폴레옹은 그녀의 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약혼을 했다. 그러나 데지레와 파혼을 하고 귀족 미망인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1796년 첫 결혼을 했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며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한 민주주의 사상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프랑스 혁명정부를 굴복시켜야만 했다. 왕당파는 반란을 일으켜 영국과 스페인 해군을 끌여들였으나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인의 위치에서 반란을 진압했고 공을 세워 24세에 장군의 위치에 올랐다.

혁명파와 왕당파간의 대립이 계속 되었고 외세의 침입도 잦았다.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17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했다. 1798년 나폴레옹은 5만여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시도하자 나폴레옹은 인도 원정을 취소하고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1800년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하였고 원정대를 이끌고 알프스의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때 많은 부관들이 말렸는데 나폴레옹의 어록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1803년 부르봉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왕당파가 영국과 동맹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영국이 배후라는 것에 측근들은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서 스스로 왕관을 황제관을 쓰고 황제에 올랐다.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공화정이 수립하고 10년만에 프랑스 황제가 등극한 것이다.

나폴레옹 대관식 - 부인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1805년 나폴레옹응 영국 상륙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 동맹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빈을 점령하였으며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이 날의 승리를 기념하며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홀란드) 국왕에 앉히며 신성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1807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동생 제롬을 베스트팔렌의 왕에 임명하였다.

1808년에는 카를로스 3세와 왕세자 페르난도 7세를 협박하여 왕권을 양도받아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올렸다. 나폴레옹은 훗날 스페인 왕위찬탈은 정의롭지 못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스페인 왕실 가족이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려고 하자 스페인 전역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프랑스는 1813년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1810년 부인 조제핀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며 나폴레옹 2세이다.

교황 비오 7세가 전쟁에 반대하고 중립을 고수하며 대륙봉쇄령을 지지하지 않자 1808년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령을 합병했다. 교황이 반발하여 파문을 선포하자 체포하여 사보나에 유폐시키고 1813년 교황령 권리포기 등을 포함한 조약에 서명을 받아냈다.

 

스웨덴에서 베르나도트(훗날 칼 14세)가 왕위계승자가 되며 나폴레옹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옛 약혼녀 데지레와 결혼을 하였는데 나폴레옹은 그녀와의 파혼에 대한 미안함이 컸기에 베르나도트에 대해 냉정하지 못했다. 스웨덴은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하며 나폴레옹 몰락에 압장섰다. (이후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칼 14세로 즉위하며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가 된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동맹군에 포위되며 프랑스는 대패하게 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고 1814년 나폴레옹은 지중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는 왕정복구가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 삼고 싶었지만 인정받지 못하였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왔고 재기하며 명목상 왕위에 있던 루이 18세는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1815년 월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나폴레옹의 재기는 백일천하로 끝이 나버렸고 (실제로는 95일) 남대서양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되었다.

나폴레옹은 유폐되어 건강이 악화되다가 1821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나폴레옹 가계도

 

나폴레옹 2세

1811~1832 재위 1815.6.22~1815.7.7

 

나폴레옹에게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나 모두 서자였고 정비였던 조제핀 황후와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 샤를을 낳았다. 나폴레옹 샤를은 태어나자마자 황태자 작위인 로마왕에 책봉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퇴위당하고 엘바 섬에 유폐되자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는 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의 궁전에서 지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황제에 복위하였으나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장군 나이페르크 백작과 불륜관계에 있어 돌아가지 못하였고 나폴레옹 샤를만 프랑스로 돌아왔다. 백일만에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리나섬으로 귀양가며 아들 나폴레옹 샤를을 나폴레옹 2세로 선포하였으나 보름만에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1818년 외조부인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 2세에게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내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빼고 프란츠를 넣었으며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독일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폐위시키고 후임자로 나폴레옹 2세를 올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나폴레옹 2세는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아 실패했다.

이후 2차대전 시기에 파리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는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으로 이장해주었다.

 

 

나폴레옹 3세

1808~1873 

프랑스 대통령 재위 1848~1852

프랑스 황제 재위 1852~1870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이며 프랑스의 마지막 세습군주이다.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3남으로 나폴레옹 1세의 친조카이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첫번째 부인 조제핀의 전남편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고 아버지 루이는 네덜란드 왕(1806~1810)을 지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에 유폐되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1832년 나폴레옹 샤를(라이히슈타인 공작)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라고 판단하여 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루이 필리프 국왕은 루이 나폴레옹을 미국으로 추방시켰다가 1837년 어머니 오르탕스가 위독하자 다시 불러들였으나 이듬해에는 스위스에서도 쫓겨나 영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1839년 '나폴레옹 이념'을 출간하여 나폴레옹 1세를 찬양하였다. 1840년 체포되었으나 1846년 탈출하여 영국에서 지내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소식에 파리로 갔으나 임시정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새로 창당된 질서당의 지원을 받아 출마하였고 12월 선거에서 74.3%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주요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하였고 독재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당시 프랑스는 4년 단임이었기에 루이 나폴레옹은 헌법개정을 추진했으나 개헌안은 통과되지 못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파리를 점령하고 의회를 강제해산시키고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였다.

1852년 10년 임기의 대통령이 되었고 재투표를 실시해 97%의 지지를 얻어 프랑스 제2제정 황제에 즉위했다.

1853년 외제니 드 몽티조와 결혼하였고 국내 정책을 통해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다. 또한 대외에서도 주도권을 쥐며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1866년 조선의 로마 가톨릭 탄압인 병인박해로 죽은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그의 정책이 기대했던 만큼 성공적이지 않자 반 나폴레옹 세력들도 늘어나고 있었는데 여러 대외정책이 실패하자 반대파의 세력 또한 커졌다. 

1870년 스페인 혁명 정부는 새로운 왕위 후보를 찾던 중 프로이센 빌헬름 1세의 친척 레오폴트에게 스페인 왕위를 제안하였고 이때 프랑스는 강력히 항의를 했다.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여 수락발표를 하였는데 프랑에서 강력히 항의하자 빌헬름 1세는 철회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는 프랑스 대사를 빌헬름 1세에게 보내 재발 방지에 대한 서면보장을 요구하였고 이에 감정이 상한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에 이 사실을 알렸다. 나폴레옹 3세는 공식적으로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스당전투에서 패하며 포로가 되었다. 전쟁의 실패로 파리가 포위당하였고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후 영국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명목상 프랑스 황제는 아들 나폴레옹 4세가 물려받았으나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1879년 전사했다.

나폴레옹 3세 -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나폴레옹 4세)

나폴레옹 4세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1856~1879

 

프랑스 최후의 황태자인 나폴레옹 4세는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과  외제니 드 몽티조의 아들이다. 1870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며 황태자직을 박탈당하였다. 1873년 명목상의 황제로 황위를 요구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였고 1876년 영국 육군에 입대하였다가 1879년 전사하며 나폴레옹 황실의 가계는 단절되었다.

보나파르트 황실의 수장은 제롬과 카타리나의 차남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가 되어야 했으나 나폴레옹 4세가 그를 싫어하여 사망하며 나폴레옹 조제프의 장남 나폴레옹 빅토르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나폴레옹 지지자들에게 나폴레옹 빅토르는 나폴레옹 5세로 불리며 보나파르트 수장을 지냈다.(1879~1926)

(왼)나폴레옹 빅토르 - (오른)나폴레옹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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