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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

GoodFortune 2022. 10. 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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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80년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군연합을 이루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이 통치하였다.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1580~1598), 펠리페 2세(1598~1621), 펠리페 3세(1621~1640)는 스페인에서는 각각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가 된다.

164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군연합이 해체되며 포르투갈은 독립하게 되었고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후 브라간사 왕조가 1853년까지 200년 넘는 시간동안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주앙 4세

1604~1656 재위 1640~1656

 

브라간사 공작 테오도지오 2세과 스페인의 아나 데 벨라스코의 아들이다. 할머니 카타리나는 마누엘 1세의 손녀이자 두아르트 1세 기마랑이스 공작의 딸이기에 아비스 왕가의 후손이다. 1640년 7월 카탈루냐의 폭동 진압에 포르투갈 병력을 이용한 것이 촉발제가 되어 쿠데타가 발생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은 포르투갈의 귀족들과 함께 스페인 총독을 몰아내고 주앙 4세로 즉위했다. 이후 28년간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이 계속 되었고 1668년 아폰수 6세 때에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루이자 데 구스만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딸 카타리나는 잉글랜드 찰스 2세의 왕비가 되었고, 아들 아폰수 6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정신병을 앓고 있어 아폰수 6세의 남동생 페드루가 섭정이 되었다.

 

 

아폰수 6세

재위 1643~1683 재위 1656~1683

 

주앙 4세와 루이사 데 구스만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망 후 13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국정 통치력이 없었다. 1666년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과 결혼했으나 왕비 마리는 남편의 성불구를 이유로 혼인 무효를 신청했고 교회는 이를 승인했다. 이후 그녀는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와 결혼했다. 아폰수 6세의 정신병을 이유로 동생인 베자 공작 페드루가 섭정이 되었는데 1668년 페드루는 형에게 왕권을 포기하도록 강제하였고 아소르소 제도로 유배시켰다. 1683년 아폰수 6세가 사망한 후 페드루는 왕위에 올랐다.

 

 

페드루 2세

1648~1706 재위 1683~1706

 

주앙 4세와 루이사 데 구스만의 아들이다. 베자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1668년 정신병을 앓고 있는 형 아폰수 6세의 섭정이 되었다. 1668년 형 아폰수 6세를 아소르소 제도에 유배시키고 실권을 행사했으며 1683년 아폰수 6세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식민지 브라질의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은광이 발견되어 포르투갈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첫째부인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마리아는 원래 형 아폰수 6세와 결혼했으나 성불구로 혼인 무효화를 하고 페드루 2세와 결혼했다) 은 딸을 낳은 후 사망했고 둘째부인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 마리아 소피아와 결혼해 6명의 자녀를 얻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지했으나 1703년 잉글랜드와 메슈엔 협약을 체결하며 포르투갈, 영국, 오스트리아 간에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다. 메슈엔 협약은 포르투갈의 와인과 잉글랜드의 모직물 수입을 상호촉직하는 것에 대한 협약이었다.

 

주앙 5세

1689~1750 재위 1706~1750

 

신성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와 결혼해 6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녀 바르바라는 페르난도 6세와 결혼해 스페인 왕비가 되었고 주제는 포르투갈 왕위를 이었다. 아들 페드루는 훗날 포르투갈 마리아 1세의 남편이 된다.

주앙 5세는 절대군주로 군림하여 포르투갈의 태양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제

1714~1777 재위 1750~1777

 

주앙 5세와 마리아 아나의 아들이다. 형 페드루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1729년 스페인 펠리페 5세의 딸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결혼하였다. 빅토리아는 여러번 임신이 되었으나 아들 2명과 딸 1명은 사산되었고 딸 4명만 살아남았다.

1750년 아버지 주앙 5세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세바스티앙 조세 드 카르발류 이 멜루(폼발 후작)가 실권을 잡고 통치를 하였다. 주제는 아들 후계가 없자 장녀 마리아 프란시스카를 왕위계승자로 선포하였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 발생하여 10만여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밀실 공포증이 생겨 벽이 있는 건물 안에서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거처를 아쥬다 언덕의 텐트로 옮기기도 하였다. 

1758년 주제와 카르발류를 살해하기 위한 귀족들의 음모가 발각되어 주제는 타보라 가문을 추방하고 예수화 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교회 부지를 모조리 몰수하기도 하였다. 1762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공격하여 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을 받고 스페인은 프랑스 지원을 받아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듬해 파리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1777년 사망 후 딸 마리아 1세와 사위이자 남동생인 페드루 3세가 공동왕위로 왕위를 계승했다.

리스본에는 주제의 기마상이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진다.

리스본에 있는 주제의 기마상

 

마리아 1세

1734~1816 재위 1777~1816

 

주제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딸이다. 주제가 아들이 없어 장녀 마리아 프란시스카를 왕위계승자로 선포하였다. 브라질 왕국의 초대국왕이기도 하다. 남편 페드루 3세(1717~1786 재위 1777~1786)와 함께 공동 왕위였지만 페드루 3세는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6명(3남 3녀)은 요절하였고 4남 주앙만이 살아남아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1807년 반도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포르투갈을 침공하자 마리아 1세는 주왕 왕자의 지시 하에 브라질로 이동했다. 1815년 브라질은 식민지에서 왕국으로 승격되어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이 탄생했다.

마리아 1세는 브라질에서 1816년 사망했다.

 

 

주앙 6세

1767~1826 재위 1816~1826

 

페드루 3세와 마리아 1세의 아들이다. 1807년 어머니 마리아 1세와 함께 브라질로 이동했고 마리아 1세가 병약해지자 섭정을 맡았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라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했다. 1822년 브라질 왕국이 독립하면서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브르 연합왕국은 해체되었고 브라질 제국의 황제위는 아들 페드루 4세가 이어받았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딸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결혼하여 3남 6녀를 두었다.

 

 

페드루 4세 (브라질 페드루 1세)

1798~1834 재위 1826.3~1826.5

브라질 제국 황제 1822~1831

 

주앙 6세와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아들이다. 형 프란시스쿠 안토니우가 요절하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807년 마리아 1세가 브라질로 피난을 가며 페드루 4세 또한 브라질로 갔고 이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냈다.

1817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딸 마리아 레오폴지나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 1세가 사망한 후 주앙 6세는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했지만 페드루는 브라질에 남아 있었다.

포르투갈 본국 의회에서 연합 왕국을 해제하고 브라질을 식민지로 되돌리려 하자 브라질인들은 반발하였고 페드루는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초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전제주의적 통치 방식을 택하며 반발이 심해졌다. 우루과이를 놓고 벌인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1828년 우루과이의 독립을 승인하며 인기가 떨어졌다.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1831년 5살인 아들 페드루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826년 주앙 6세가 사망했을 당시 2개월간 포르투갈 왕을 겸했으나 7살이었던 장녀 마리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황후 마리아 레오폴지나가 사망한 후 1829년 아멜리아와 재혼하여 딸 마리아 아멜리아를 낳았다.

 

마리아 2세

1821~1853 재위 1826~1828 1834~1853

 

페드루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지나의 딸이다. 조부인 주앙 6세 사망 후 아버지인 페드루 1세가 왕위를 받았으나 브라질 제국의 황제였던 페드루 1세는 7살밖에 안된 장녀 마리아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마리아와 결혼을 약속한 숙부 미겔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828년 조카 마리아의 왕위를 빼앗고 그녀를 외국으로 망명시켰다.

페드루 1세는 1832년 직접 군대를 끌고 포르투갈로 와서 미겔과 전쟁을 벌였다. 페드루 군은 리스본을 차지하였고 마리아도 귀국하여 1833년 의회로부터 국왕임을 인정받았다.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남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으나 병으로 남편이 두달만에 사망했다. 1836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페르난두 공자(페르난두 2세)와 재혼하여 공동왕이 되었다. 두번째 남편으로부터 11명의 자녀를 낳았고, 1853년 마지막 아이를 낳다 사망하였다. (이후 그녀의 아들 페드루 5세가 즉위하며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 왕가가 시작된다)

 

 

미겔 

1802~1866 재위 1828~1834

 

주앙 6세와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아들이자 페드루 4세의 동생이다. 조카인 마리아 2세와 약혼하였으나 그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시대에 맞지 않게 전제 군주제로 전환하는 정책을 행하였고 브라질 황제 페드루 4세(브라질의 페드루 1세)는 제위를 아들(브라질 페드루 2세)에게 물려주고 군대를 끌고 포르투갈로 돌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패한 미겔은 왕위를 다시 조카 마리아에게 주어야 했다.

 

 

마리아 2세와 페르난두 2세

마리아 1세까지가 브라간사 왕가의 국왕들이며 마리아 2세와 페르난두 2세의 아들 페드루 5세가 즉위하며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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