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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부르고뉴(보르고냐) 왕가와 아비스 왕가

GoodFortune 2022. 10. 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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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투갈 왕국은 1139년부터 1910년까지 유럽에 존재한 왕국이다.

부르고뉴 왕가의 아폰수 1세가 레온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을 독립시키며 초대 왕이 되었고 포르투갈 왕국이 시작되었다.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부르고뉴 왕가

포르투갈 부르고뉴 왕가에서는 3명의 왕에 대한 기록만 찾아볼 수 있었다.

다른 왕에 대한 기록은 찾게 되면 업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아폰수 1세

1109~1185 재위 1139~1185

레온 왕국으로부터 갈라시아 왕국의 남부 지역의 독립을 성취하며 포르투갈의 초대 왕이 되었다. 

부르고뉴의 엔히크(앙리)와 알폰소 6세(레옹, 갈리시아, 카스티야의 왕)의 서녀 테레사의 아들이다. 1095년 알폰소 6세는 프랑스 로베르 2세의 증손자인 부르고뉴의 앙리와 자신의 서녀 테레사와 결혼시키고 포르투갈 백작령을 부여했다. 앙리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앙리 사후 아들 아폰수가 4세의 나이였기에 어머니 테레사가 섭정을 했다. 테레사 또한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1121년 여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아들과 다툼이 발발했다. 1128년 아폰수가 권력을 장악하고 포르투갈을 독립시키며 1139년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으로 칭하였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국왕을 정식 인정받으며 부르고뉴 왕가의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포르투갈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아폰수 1세의 자손이다.

 

포르투갈 부르고뉴 왕가 가계도 - 연두색부터는 아비스 왕가

 

산슈 1세

재위 1185~1211

 

아폰수 2세

재위 1211~1223

 

산슈 2세

재위 1223~1247

 

아폰수 3세

재위 1247~1279

 

디니스 1세

1261~1325 재위 1279~1325

 

아폰수 4세

재위 1325~1357

 

페드루 1세

1320~1367 재위 1357~1367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의 차남이다. 카스티야의 공주 콘스탄사와 결혼하였는데 아폰수는 그녀의 시녀인 이네스를 보고 반했다. 아폰수 4세는 이네스를 궁에서 추방시켰지만 그럼에도 둘은 헤어지지 않았다. 콘스탄사가 결혼 4년만에 출산후유증으로 사망하며 페드루가 이네스만을 원하자 아폰수 4세는 이네스를 처형했다. 페드루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고, 아버지 사망 후 1357년 왕위에 올랐다. 페드루는 즉위한 후 아네스의 자녀들을 공주, 왕자로 선언하기도 했다. 첫번째 부인 콘스탄사의 아들 페르난두 1세가 왕위를 이었다.

 

 

페르난두 1세

1345~1383 재위 1367~1383

페르난두는 페드루 1세의 아들로 아버지 뒤를 이어 1367년 왕위에 올랐다. (포르투갈 왕국의 9대 왕) 페르난두는 1369년 카스티야의 왕 페드로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왕들과 경쟁해야 했다. 페르난두의 이복형제인 엔리케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며 갈등이 생겼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페르난드는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르 공주와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페르난두는 레오노르 텔레즈라는 자신의 가신의 아내에게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혼인을 무효화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이 사건으로 포르투갈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엔리케 2세와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1379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또다시 카스티야의 왕위를 요구하였고 1382년 평화조약을 맺어 페르난두의 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가 결혼하게 되었다. 페르난두는 아들 없이 사망하며 부르고뉴 왕가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페르난두의 이복형제인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이 왕위를 주장하였고 1385년 주앙이 왕위에 올랐다.

 

 

아비스 왕가

포르투갈의 두번째 왕가는 아비스 왕가이다.

 

주앙 1세

1357~1433 재위 1385~1433

 

주앙 1세는 아비스 왕가의 시조이자 포르투갈 왕국의 10대 국왕이다. 페드루 1세와 정부 테레사 로렌수의 서자로 태어나 아비스 기사단장을 맡았다. 페드루 1세의 아들 페르난두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며 왕위를 요구하였다. 페르난두 1세의 사위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와 왕위를 놓고 대립하였으나 1385년 전쟁에서 후안 1세를 상대로 승리하며 국민의회의 선거로 포르투갈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에도 후안 1세와의 대립은 계속 되었고 1411년이 되어서야 카스티야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387년 잉글랜드 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드워드 3세 아들)의 딸 필리파와 결혼해 아폰수, 두아르트, 페드루, 엔히크 등의 아들을 낳았다. 주앙 1세는 치적을 통해 서자라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왕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3남 엔히크는 포르투갈 왕국 초장기 주요인물 중 한명으로 서아프리카 연안 탐사와 대서양 탐험과 개척을 이끌며 항해왕자로 알려졌다. 엔히크는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 수 있게 하였으며 주앙 2세(재위 1455~1495) 시절 포르투갈 식믹지 확장의 기반을 닦았다.

 

 

두아르트 1세

1391~1438 재위 1433~1438

 

주앙 1세와 랭커스터의 필리파 사이의 아들이다. 형 아폰수가 있었으나 1400년 사망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1433년 아버지 주앙 1세가 흑사병으로 사망하자 42세에 왕위에 올랐다. 동생 엔히크의 해양탐사를 적극 지원했다. 1437년 모로코의 탕헤르 원정에서 크기 실패하였고 막내동생 페르난두 왕자가 인질로 붙잡히는 일을 겪었다. 왕자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438년 흑사병으로 사망했고 페르난두는 모로코 포로 수용소에서 1443년 사망했다.

 

아폰수 5세

1432~1481 재위 1438~1481

 

두아르트와 아라곤의 엘레아노르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흑사병으로 사망하며 1438년 6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폰수가 어렸기에 어머니 엘레아노르가 섭정을 하였으나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국민의 거부감이 심했다. 반대세력으로 1439년 섭정은 아폰수 5세의 삼촌 페드루가 하게 되었다. 페드루는 1445년 자신의 딸 이자벨라를 아폰수 5세와 결혼시켰고 1448년 아폰수 5세는 친정을 시작했다.

페드루 섭정 시절 브라간자 공작 아폰수는 불만이 많았는데 그는 주앙 1세의 서자이자 섭정 페드루의 이복형제였다. 아폰수 5세에게 페드루를 이간질시키며 페드루를 견제하였다.

친정을 시작한 아폰수 5세는 페드루 섭정 기간의 모든 법령과 포고령을 무효화시켰고 1449년 페드루의 군대와 아폰수 5세의 군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페드루는 전사했다. 이후 브라간자 공작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브라간자 공작에 의해 많은 정책들이 추진되었고 왕권이 계속 추락했다. 아폰수 5세는 해외 원정으로 왕권을 높이고자 하여 삼촌 엔히크가 중단한 아프리카 원정을 재시도하였다.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 1471년 아르질라를 정복하였고 1481년 탕헤르까지 정복한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의 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474년 카스티야 엔리케 4세 사망 후 왕위계승 분쟁이 벌어져 혼란스러웠는데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 왕위를 탐내며 분쟁에 개입했다.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와의 분쟁에서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혼인하여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였다. 1475년 카스티야를 침공하였으나 4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왕위를 이사벨에게 이어졌고 후아나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폰수 5세는 아들 주앙 2세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수도원이 은거하다 1481년 사망했다.

아폰수 5세는 사촌인 첫번째 부인 이자벨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 인판테 주앙이 다음 왕위를 이었다. 1455년 이자벨라 사망 후 후아나와 마리아 소아르스와 두번 재혼하였고, 마리아 소아르스 사이에서 서자를 한명 두었다.

 

 

주앙 2세

1455~1495 재위 1481~1495

 

아폰수 5세와 코임브라의 이자벨라의 아들이다. 형이 있었으나 요절하여 장남으로 자랐다.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의 딸과 결혼하였다.

왕자시절 1471년 아폰수 5세의 모로코 원정에 함께 참전하였고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쟁에 뛰어들며 1475년 섭정으로 임명받아 통치하였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에는 실패했으나 이사벨 1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많은 것을 얻어냈다. 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모로코 지역에 대한 독점 정복권도 얻었다. 남쪽의 모든 대서양에서 항해, 정복, 지배, 무역의 독점권을 획등하며 스페인(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포르투갈 허락 없이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1471년 사촌 레오노르와 결혼하였다. 레오노르는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의 딸이었다. 둘 사이에 아폰수 왕자가 있었으나 아라곤 페르난도 2세의 장녀 이사벨과 결혼후 얼마 안되 낙마사고로 사망하였다.(1491년)

1481년 아버지에게 왕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브라간자 공작 가문의 권력에 의해 왕권이 실추된 상황이었다. 주앙 2세는 브라간사 공작의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대귀족들이 누리던 특혜를 축소하고 군주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귀족들은 반발하였고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계획했다. 주앙 2세는 브라간사 공작을 체포하여 처형을 집행하였다. 귀족들은 쿠데타를 통해 비제우 공작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주앙 2세는 비제우 공작을 직접 처형하는 등 80여 명의 귀족들을 처형했다. 주앙 2세는 국왕의 절대권력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서안 탐험을 재개하여 교역을 하였고 인도를 향한 신항로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1487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왕명을 받아 3척의 배를 끌고 인도를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폭풍의 곶을 발견하였고 이곳은 주앙 2세에 의해 희망봉으로 재명명 되었다. 이 항해로 인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포르투갈 아비스 왕가 가계도

 

마누엘 1세

1469~1521 재위 1495~1521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와 베이트리스의 아들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항해왕자 엔히크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는 대귀족으로 큰 권력을 누렸다. 마누엘은 페르난두의 막내였기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위로 4명의 형들이 죽고 디오구는 역모를 추진하다 주앙 2세에게 죽임을 당하며 페르난두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1491년 왕세자 아폰수가 낙마사고로 사망하며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1495년 주앙 2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마누엘 1세는 신항로 개척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497년 바스코 다가마는 신항로 개척을 성공하여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슬림 상인들과의 갈등으로 바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 2년만에 리스본으로 귀항했지만 유럽 최초의 신항로 개척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1500년 리스본을 출항하여 인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해류와 무역풍에 밀려 브라질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한 곳을 포르투갈 영토로 선포한 후 인도로 향했다. 캘리컷에서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아랍상인들의 방해로 교역이 원할하지 못했다. 카브랄은 아랍상선을 약탈했고 아랍인들은 교역소를 습격하여 포르투갈인 54명을 죽였다. 이 일로 카브랄은 항구일대에 무차별 함포사격을 퍼붓고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 일로 포르투갈과 캘리컷은 갈등관계가 계속 되었다. 카브랄은 칸나노르와 코친으로 이동하여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향신료 등을 구입하여 귀국했다.

주앙 다노바는 3차 인도 원정대를 이끌고 칸나노르에 교역소를 설치하였으나 캘리컷의 해군의 공격을 받아 포르투갈과 인도 간의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다노바는 돌아오는 길 남대서양에서 세인트헬리나섬을 발견하였다. (이 곳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1502년 포르투갈 군함은 인도로 가서 캘리컷 인근 해전에서 그들을 격퇴였고 이후에도 5차 6차 원정을 통해 인도와의 교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에 총독을 두어 안정된 해상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해양 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축척한 포르투갈은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 그의 재위 중 지어진 건축물은 화려한 장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마누엘 양식이라고 불렀다. 대표적 건물로는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탑, 바탈야 수두원 등이 있다.

아라곤 카스티야의 공동왕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장녀 이사벨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3녀 마리아와 결혼해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또한 펠리페 1세와 카스티야의 후아나의 딸이자 이사벨 1세의 손녀인 레오노르와 세번째 결혼을 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한마디로 카스티야의 이사벨1세의 두 딸과 손녀와 모두 결혼을 한것!!!)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10명의 자녀 중 장남이 주앙 3세로 왕위를 이었고, 장녀 이사벨은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황후가 되어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생모가 된다. 또한 아들 주앙 3세는 이사벨 1세의 손녀 카탈리나와 결혼을 했다.

마누엘 1세의 세번째 부인 레오노르와 사위 카를 5세, 카탈리나는 남매가 되니 처남이 사위가 되고 처제가 며느리가 되는 아주 복잡한 가계도를 갖고 있다..............

세번째 부인 레오노르는 미망인이 된 후 프랑스 프랑수아의 왕비가 되었다.

1521년 흑사병에 걸려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벨렝탑, 제로니무스 수도원

 

 

주앙 3세

1502~1557 재위 1521~1557

 

마누엘 1세와 두번째 부인 마리아의 아들이다. 이복형 미겔의 요절로 왕위계승자가 되어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1525년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와 결혼하였다. 카탈리나는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여왕의 막내딸로

주앙 3세 또한 아버지 뒤를 이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영토를 확장하며 포르투갈을 거대한 제국으로 키워나갔다.

넓은 영토와 향실료 등 식료품 무역을 독점하여 포르투갈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카탈리나와의 사이에 9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주앙 3세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 주앙 마누엘은 카를 5세와 주앙 3세의 여동생 이사벨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여 왕위를 잇는 아들 세바스티앙을 낳았고 장녀 마리아 마누엘라는 스페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해 스페인 왕비가 되었는데 이 두 가족은 2대에 걸쳐서 겹결혼을 했다.

왕위는 손자 세바스티앙에게 이어졌다.

 

세바스티앙

1554~1578 재위 1557~1578

 

세바스티앙은 주앙 3세의 아들 주앙 마누엘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이자벨의 딸이다. 세바스티앙은 양가의 겹결혼으로 인해 주앙 3세의 친손자이자 외손자가 된다.(세상에....)

세바스티앙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18일 후에 태어나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후아나가 아들을 낳지 않으면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옮겨질 가능성이 있기에 세바스티앙의 탄생은 포르투갈의 축복이었다. 어머니 후아나는 약혼시의 결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세바스티앙은 주앙 3세가 사망하며 1557년 3살의 나이로 즉위하였고 조모 카탈리나가 섭정이 되었고 1562년~1568년에는 대숙부 돈 엔히크가 섭정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약혼을 하였으나 결혼은 연기되었고 1578년 이슬람군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여 전사하며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엔히크

재위 1578~1580

 

마누엘 1세의 아들로 주앙 3세의 동생이다.

 

 

안토니우

재위 1580

 

마누엘 1세의 손자로 베자 공작 루이스의 아들이다. 아비스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아비스 왕가 이후에는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80년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군연합을 이루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이 통치하였다.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1580~1598), 펠리페 2세(1598~1621), 펠리페 3세(1621~1640)는 스페인에서는 각각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가 된다.

164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군연합이 해체되며 포르투갈은 독립하게 되었고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후 브라간사 왕조가 1853년까지 200년 넘는 시간동안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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