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의 몰락 우왕 창왕 공양왕

GoodFortune 2019. 8. 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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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고려 32대 왕)

1365-1389

재위 1374-1388

 

창왕 (고려 33대 왕)

1380-1389

재위 1388-1389

 

공양왕 (고려 34대 왕)

1345-1394

재위 1389-1392

 

우왕은 공민왕의 서자 '모니노'이다. 공민왕은 그의 생모를 순정왕후 궁인 한씨로 포고하였는데, 생모는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라고 한다. 또한 고려서에서는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왕은 1371년(공민왕20)에 7세의 나이로 입궐하여 태후전에서 지냈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였고, 이인임의 섭정을 받았다.

 

이인임은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으로 승진했고, 공민왕 8년에 서경존무사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다. 숙부 이승경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막으며 1등 공신에 올랐다. 공민왕13년 최유 등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했고, 공민왕17년에 원의 동녕부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신돈의 문하에 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는데 공민왕23년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우왕2년 신돈의 비천이었던 반야라는 사람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반야는 처형되었지만 훗날 이성계 일파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반야가 신돈의 아이를 낳았는지, 공민왕의 아이를 낳은 것인지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 하기 위한 조선의 기록이었을 것이라 주장되기도 한다.

 

고려 우왕 (육룡이 나르샤)

 

1374년(우왕 즉위) 8촌 형 심왕(심양왕의 이름이 바뀜) 탈탈불화가 스스로 고려왕이라 주장하며 고려의 왕위를 요구했으나 이인임 등이 탈탈불화의 입국을 차단했다.

 

심왕은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책봉받은 심양왕이 바뀐 것인데, 그 후로 왕씨 왕족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충선왕은 왕고에게 양위했고, 연안군 왕고 사후 고려왕인 충목왕, 충정왕이 이어서 겸직하였다. 그후 강릉대군 왕덕수의 아들 탈탈불화가 심왕으로 있었다.

 

우왕 즉위 초 우왕의 할머니가 되는 축숙왕 비 명덕태후가 섭정하였는데, 명덕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우왕은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를 혼란에 빠뜨렸다. 명덕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엔 이인임이 실권을 휘둘렀다. 공민왕의 정비 안씨는 자신의 오라버니 안숙로의 딸을 그의 후궁으로 천거했다.

 

우왕은 9명의 왕비와 3명의 옹주를 두었는데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강제로 차출한 것이었다. 판개성부사 이림의 딸인 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33대 왕 창왕을 낳았다. 이성계가 우왕을 축출한 후 창왕의 생모인 근비와 현비, 우왕의 유배행을 동행한 영비 최씨와 명순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비빈들은 폐출되었다.

 

고려 우왕 가계도

 

우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원명 교체시기로 북원과 명나라 모두에게 압박을 받았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려는 명나라와 북원에 모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377년(우왕3) 북원이 사신을 보내 우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조서를 보내오며 양국의 갈등은 가라앉았다.

 

우왕 때에는 278회의 침입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정몽주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하고 판사 최무선의 건의를 받아 화통도감을 설치했다. 1380년(우왕6) 최무선 등이 새로 개발한 화포를 이용해 왜선을 격침시키고 이성계가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를 무찌르면서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후 1383년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1387년 이인임이 노병으로 은퇴하게 되자 우왕은 정치적 힘을 잃었다. 1388년(우왕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 통고를 했고,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의 요청을 받자고 하였다. 최영과 우왕은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 강행을 명령했으나 이성계는 명령에 불복하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우왕을 퇴위시키고, 우왕의 외아들 9살의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당시 이성계, 정도전은 후임자로 다른 왕족의 자손을 추대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색이 전왕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다하여 공민왕의 4비 정비 안씨의 교서를 받아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 창왕 가계도

 

창왕은 우왕을 강화도에서 경기도 여흥으로 옮겼고,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에 의해 사형시켰다. 창왕은 어린 나이임에도 독자적 판단을 하여 정사를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는 계속 자신들의 개혁 정책을 왕에게 상주하여 허락할 때까지 엎드려 있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창왕이 부왕 우왕을 복위시켜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들통나자, 1389년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붙여 폐위시켰고, 고려 왕실의 먼 종친인 고려 20대 왕 신종의 6대손 정원군의 차남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1389년 공양왕 즉위 후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시해당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을 신돈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형관들에게 왕씨 후손임을 증거로 웃옷을 벗어 겨드랑이의 비늘 같은것을 내보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성계 일파는 그해에 강화도에서 창왕도 죽였다.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34대 왕이자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형인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관계였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는 고려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성계, 정도전은 역성 혁명을 꾀하고 있었다.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후, 온건 개혁파는 약화되었다.

 

1392년(공양왕4)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은 공양왕을 폐위하고 고려는 멸망하였다. 공양와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고려 공양왕 가계도

공양와의 왕비 순비 노씨는 창성군 노진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다. 공양왕이 폐위된 뒤 원주로 함꼐 유배되었다. 1394년 공양왕이 사약을 받을 때 함께 사사되었다. 아들 정성군은 1388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92년 폐세자되었고 강원도 삼척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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