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근현대사

대한민국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

GoodFortune 2019. 8. 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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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1897-1990

대통령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

 

윤보선은 1897년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중추원의관 윤치소와 전주 이씨 이범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그의 당숙어있다. 몰락한 가계에서 당숙 윤치호가 대한제국 외부부,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며 가세를 일으켰다.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고 어머니 집안 또한 아산의 만석꾼이었다. 윤보선이 어려서 자란 안국동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윤보선 자택 안동장

 

윤보선은 을사늑약 직후 10세에 한성부로 이사를 와서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10년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치한 일출소학교에 편입하였다. 1913년 도쿄로 유학을 가서 게이오 의숙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그만 두었다. 기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으나 그해 말 일본 유학을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해 있던 중 독립운동을 하고있는 여운형을 만났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윤보선은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 집안의 반대가 있을 것이기에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 공부를 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말하였고, 상하이를 경유해 미국으로 간다고 하며 상하이로 갔다.

 

 

1917년 상하이에 도착한 윤보선은 임시정부로 찾아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윤보선은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는데 당시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3.1운동 이후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동생 윤완선을 통해 활동자금을 받아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하라는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충고로 영국으로 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는데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이후 신규식의 아들과 윤보선의 딸의 결혼으로 둘은 사돈이 되기도 한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갔다.

 

우드블록 대학에서 1년,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 공부한 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스트레스와 과로로 2년간 병중에 있어 휴학하였고 6년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했다. 윤보선은 유학 중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 함께 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귀국하기 싫었던 윤보선은 1930년 졸업 후, 여행을 다니다 1932년에 귀국했다. 윤보선은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1937년 민씨와 사별하였고 이후 10년 이상 독신으로 생활했다. 1940년 외부출입을 줄이고 칩거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 한국민주당에 흡수됐다. 숙부 윤치영, 부친 윤치소, 당숙 윤치호는 친일경력이 있었지만, 윤보선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으로 명망을 얻었다. 윤보선은 막강한 집안 재력으로 한민당 창당시 집과 비용을 제공했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가 됐던 안국동 사저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45년 12월 당숙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비판 끝에 사망하였으나 독립운동 경력으로 연좌되지 않았다.

 

 

1946년 민중일보社 사장을 맡았고, 1947년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소식을 접하고 그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때 충남 아산시에서 한민당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이승만의 비서관이 되었다 2달만에 사퇴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민중일보의 사주로 있겠다며 사양했다.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숙부였던 윤치영이 내각을 조직했기에 그는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 여러번의 제의를 사양했다.

 

 

19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 시장에 임명됐다. 윤보선은 서울시장직을 피하려 별장에서 은둔했지만 발령에 의해 서울 시장이 되었다. 당시 서울의 가장 큰 문제는 거리의 쓰레기와 인분이었다. 그는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도록 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리고, 방역 소독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일로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관공서와 공중화장실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여 악취를 제거하는 등 위생에 힘썼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수세식 양변기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서울시장 재직중 공덕귀와 재혼을 하였다. 미국 유학 준비 중이던 공덕귀는 유학을 포기하고 장남 윤상구를 낳고, 6.25 전쟁 중 둘째아이를 유산했고, 셋째 윤동구를 낳았다.

 

윤보선 가족

 

1949년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윤보선은 자리를 거듭 고사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상공부 장관직에 임명했다. 그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도시락을 싸들고 갔고, 누구에게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상공부 장관이 뇌물수수 누명을 쓰고 물러난 것에 신경을 쓴 것이었다.

 

윤보선은 상공부 장관 재직 중 이승만 대통령과 인사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며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승만의 부당한 인사 요구를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두었다고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것을 촉구했고, 주변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을 탄압한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자 1950년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한국전쟁 중 대한적십자사 총재위 취임하여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을 했다. 국민방위군을 직접 목격한 그는 이승만에게 보고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변명만 늘어놓자 실망이 더욱 커졌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으로 출발하여 당선이 되었으나,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에 지명되자 사임해도 받아주지 않으니 부산으로 내려가 사퇴하고 말았다. 195년 민주당 창당 후, 민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이후 제4, 5, 6대 국회에도 진출했다.

 

 

이후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60년 3.15 부정선고 규탄시위로 김주열 학생이 사망하자 마산에 내려가 진상 조사를 하였다. 내부부차관이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자, 윤보선은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1960년 제4대 국회는 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해산되었다. 8월 12일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에서 20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국무총리로 김도연을 지목했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장면으로 교체했다. 윤보선은 국가원수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기에 민주당을 탈당했다. 또한 12월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된 뒤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모임을 가지며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부에 간섭을 하며 부담을 주었다. 장면의 민주당 신파 인사에 불만이 많고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게 여긴 윤보선은 장면에게 총리직에서 물러나라는 말도 했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사퇴를 건고하였으나 할 수 없다고 했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나오자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을 했다.

 

윤보선과 장면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으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녀원에 숨었다. 윤보선은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청와대에 남았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왔다. 3시간동안 간청했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로 들어왔다.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자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했다고 한다. 5월 19일 하야 선언을 했으나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그의 사퇴를 만류했다. 윤보선은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 의견 충돌이 계속 되었다.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윤보선, 김도연, 등은 박정희를 추궁하였다. 3월 20일 허정 등과 박정희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를 했고, 박정희는 군정연장을 철회했다.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보고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했다.  1963년 초 대통령 후보에 출마 선언을 하였고,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 창당에 참여했다. 7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야당 단일후보 과정에서 허정과 심한 말 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윤보선이 군사 정변에 묵인하고 장면 내각 당시 데보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었다. 윤보선과 허정은 끝까지 경합하다가 허정이 자진 퇴진을 하여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공격했다. 당시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라는 발언을 했다. 당시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있으며 윤보선과 갈등하기도 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공산주의자 색출자)로 몰아붙이며 극우적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 윤보선은 45.1%로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산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었다. 윤보선은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국회로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하고 장택상, 박순천, 함석헌 등과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했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을 하여 중앙정보부 감시요원이 윤보선을 따라다녔고 감시를 받았다.

1964년 3월 정부가 한일 협상스케줄을 발표하자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인사 200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에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단신 농성에 들어갔고 학생회장 김덕룡이 선언문을 낭독하자 윤보선은 이를 예찬했고,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이 일로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했다.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을 지목했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단 반대투쟁을 위해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 민중당이 출범되었다. 민중당 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대립이 생기자 강경파인 윤보선은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은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에도 반대했다.

 

1966년 민중당을 탈당한 윤보선 파를 모아서 신한당을 창당했다.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에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하여 재발언하였다고 한다. 검찰은 윤보선의 발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고, 그는 언론 탄압에 대항하여 항의하였다. 야당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이 되었고, 윤보선이 제6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차이로 낙선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에서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했다. 야당단일화를 위해 후보 사퇴 종용이 있었지만 윤보선은 김대중을 불신하였다. 계속된 설득으로 윤보선은 김대중을 지지하게 되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했다. 함석헌, 김대중 등과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윤보선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대량 기자해고 사태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서울대 학생 김상진

 

1975년 4월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을 하자, 윤보선이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했으나 경찰관들이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어 그의 출입을 막았다.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윤보선이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박정희는 그의 처벌을 주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징역 8년형을 받기도 했다. 허나 전직 대통령이었기에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다. 이때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김대중이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고 김대중은 2년만에 석방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의 비격 소식을 접하였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였지만 묵살당했다. 윤보선 등은 결혼식을 위장하여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윤보선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법정구속되지는 않았다.

 

윤보선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정부에 적극협력하였는다 전두환은 안국동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기도 하였다.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여,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윤보선에게 맹비난을 퍼부었다.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윤보선은 1990년 7월 노환으로 92세의 나이로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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