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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공화국 제 11 12대 대통령 전두환, 전두환 가계도

GoodFortune 2019. 8. 2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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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1931-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4녀중 4남으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의 가문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처형당했다. 어머니 김점문은 아들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는데, 지나가는 승려가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에 쉬 집게로 자신의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5세에 대구로 이사했고 1937년 희도소학교에 입학했으나 가계가 어려워 10대 초반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부양해야 했다. 1950년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하여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전두환은 중학교 시절 권투를 했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축구부로 활동했다. (1983년 K리그 개막 경기에 직접 참관하여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싸움 실력도 뛰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고도 한다.

 

육사 동기인 노태우, 정호용 등과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노태우는 이후 평생동안 전두환의 친구로 함께 하게 된다. 1955년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군 대령 이규동의 차녀 이순자를 만났다.

 

1957년 전두환

 

1959년 6월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갔는데 당시 노태우도 함께 했었다.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 교관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했다.

1960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시위를 주도해 박정희 총애를 받았다. 5.16 당시 3명의 장교 오치성, 박창암, 차지철 대위를 파견하였는데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요구했으나 생도들이 거절했다. 육사 교장인 강영훈이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전두환은 육사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거절했다고 밀고한 후 김종필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했고 육사 교장은 구금되었다.

 

전두환은 5월 18일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을 하도록 하여 생도 800여명과 육사 소속 장교 및 졸업색 200여명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나서게 되었다.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61년 6월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을 하였고 12월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이 되었다. 1962년 박정희가 정치권에 끌어드리려 시도했으나 전두환은 국회의원 자리를 거부하고 군에 남겠다고 하였다

 

1964년 육군대학 입교, 1966년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9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1970년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 참전했다.

 

 

전두환은 손영길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친목모임 하나회를 운영해나갔는데 육사 동기인 손영길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1973년 윤필용이 보안사령관 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리자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연행되었다. 전두환 또한 윤필용이 후원해주던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지만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과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준장을 물리치고 하나회의 1인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가 되었다. 차지철의 발탁으로 임명되었으나 박정희가 전두환을 더 아끼자 차지철은 전두환을 견제했다. 노태우 또한 청와대 경호실 행장차장보로 발탁되었다. 1978년 육군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6월 1사단장 재직 당시 폭발음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주변지역 땅을 파 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았다.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를 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김재규, 박흥주(중정부장 비서관), 박선호(중정 의전과장)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하고 언론에 발표했다.

 

11월 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고 11월 중순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2월 12일 10.26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를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겠다고 최규하의 허락을 구했으나 최규하는 국방장관 노재헌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최규하의 승인 없이 정승화를 체포했고, 연행에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도 체포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에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도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국방장관 노재헌까지 연행하자 최규하는 재가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4월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하였 국내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하여 김대중, 김종필 등을 연행할 계획을 세우고 노태우, 황영시,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논의를 했다. 5월 1일부터 15일간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한생이 모여 데모를 하자 전두환은 학생들을 즉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5월 17일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5월 18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전두환은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시켰다. 이에 광주에서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 김대중 체포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는데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하여 진압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으로 시위대를 진입했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시청건물을 장악하였고,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되고 광주는 고립되었다.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하여 수십여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에서 소총을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도청을 차지하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의 핵심 세력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전두환의 완강한 부인으로 월 21일 전남도창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강요했다. 또한 그는 경제학자들을 불러 특별 과외로 경제를 배웠다고 한다.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 김재익을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되었다.

 

전두환은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254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미국으로부터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받았다.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8개월만에 사임했고, 22일 전두환은 전역했다.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11대 대통령 전두환(1980-1981)

 

전두환은 9월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등용하였는데 그에 대한 신임이 대단했다.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가 김재익을 비판하자 전두환은 둘을 청와대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10월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당인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 신민당, 혁신 정당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을 강제 해산시켰다.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또한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용하였다.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12대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혔다. 당시 국민당 김종철이 기호1번, 김의택 기호2번, 민한당의 유치송이 기호3번이었고, 전두환은 기호4번이었다.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에서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로 바꿨으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좀 변형시켜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전두환은 9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1981-1988)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해서 민정당의 당권을 대리하게 했다.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시켰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5.16혁명정신' 관련 사항을 삭제했다.

 

1981년 8월 15일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라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전두환은 맹목적 '반일'이나 '배일'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전두환은 삼청교육대를 통해 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계 인사, 반체제 인사, 5.18 민주화운동 참가자, 범죄자, 깡패, 건달, 노숙자 등을 잡아들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해 인권탄압 논란을 가져왔다. 1980년 5월 18일 이후 가택연금에 놓인 김영삼은 1983년 3주기를 맞이하여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1983년 버마 아웅산 사건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한 이범석 등 80여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2진으로 도착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조선인민군 상위 신기철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군 대위 강민철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사망했다. 이사건은 영화 '60일 지정생존자'의 소재가 되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군대가 투입되었지만,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묵인하자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 학생, 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다. 미국정부는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투입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한미연합사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음을 해명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되었고, 선진국의 시장개방 앞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 뿐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 폭이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샌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 33%에서 1989년 54%로 증가하였으나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게 되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도 선거인단을 뽑아 선출하고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1986년 부천경찰서의 경장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22세 대학생 권인숙을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이 고문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더해져 반정부성격의 6.10 항쟁이 일어났다. 1988년 올림픽 개최와 미국으로부터의 민주화 수용에 대한 압력 등이 있었기에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진압 하지 못하였고, 내무부 장관 김용갑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선제를 수용했다.

6월 29일 6.29 선언으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했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KAL 폭파사건 김현희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지지율이 40%대였는데, KAL858 폭파 사건으로 노태우에게 패하게 된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열렸다. 전두환은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했다. 1988년 11월 19일 1만 명의 학생들이 전두환 구속을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고,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 전두환의 형 전기환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비리를 일으켜 문제가 되었다.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고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12월 국회 증언대에 섰고 다시 백담사로 돌아갔다. 1990년 12월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에는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 국회의원 박계동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했다. 검찰은 1995년 성공한 쿠대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노태우가 비자금 문제로 구속 수감되자 이를 계기로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강해졌고,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와 5공화국 비리 수사도 진행했다.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전두환은 처음에는 무대응을 하였지만 1995년 12월 김영삼의 정치보복론을 주장했다. 1996년 1월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전두환은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1996년 8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투옥된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당시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정치보복일 뿐이었고, 전두환은 정치보복을 당하는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1999년 대구, 경북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50% 이상이 5공신당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전두환은 2205억의 추징금 중 532억원을 납부한 후 자신의 통장에는 29만원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300만원을 추가납부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계복귀를 노려왔음이 밝혀져 논란이 있었으나 복귀하지 못하였다. 같은해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노태우와 함께 추대되었는데, 회원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전두환은 2000년대 이후에도 많은 구설수에 오르며 논란이 되었다. 2003년 대한민국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한 일로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2008년 4월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라는 농담을 하였다.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있자 이명박 대통령 취임이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데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하였다. 검찰에 의해 전두환 일가의 수백여점의 미술품이 압수되었고 경매에 부쳐졌으며 모든 작품이 100% 완판이 되었다고 한다.

 

 

2017년 전두환은 3권의 회고록을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표현 33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 판매, 배포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어길 경우엔 5.18 기념재단 등에 1회당 5백만원을 지급해야 하도록 판결내렸다. 전두환은 33개 부분을 검은색 잉크로 지운 후 재출간하였는데, 5.18 관련 단체들은 2차 소송을 진행하였고 광주지방법원은 다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이때 36개 내용도 거짓 내용으로 추가 인정되었다.

 

2018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 되었는데, 전두환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 불출석하였다.

 

 

전두환 가계도

전두환의 형 전기환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문제가 되었다. 사촌 전순환은 기업인으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사촌 전우환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 양곡가공협회장이 되었으며 새서울용역 감사가 되었다가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전두환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전재국은 출판업체 '시공사'의 대표이이다. 차남 전재용은 포스코 박태준의 4녀와 결혼 후 이혼, 두번째 부인과 14년 만에 이혼 후 세번째 결혼을 탤런트 박상아와 하여 화제가 되었다. 삼남 전재만은 외교관으로 운산그룹 회장의 장녀 이윤혜와 결혼했다. 장녀 전효선은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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