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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 제4공화국 제5 6 7 8 9대 대통령 박정희의 일생과 박정희 가계도

GoodFortune 2019. 8. 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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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1917-1979

 

1917년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다. 둘째형인 박무희가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 일로 박정희를 공격했고, 둘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32년 졸업한 후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집이 가난하여 가족들은 그의 진학을 원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했다.

1936년 김호남과 결혼을 하고 1937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다.

1939년의 행적에 대해 종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엔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되어있다. 박정희가 만주에 있었던 것을 빼면 확인된 것은 없다. 박정희의 삼녀 박근령은 2005년 책의 출판사를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일제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나이 초과로 탈락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였다고 한다. 동봉된 편지에는 아래의 내용이 있었으며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1940년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고 1942년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고, 1944년 300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정식 만주국 육군소위로 임관하였고,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이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졸업앨범에도 같은이름으로 확인 되었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보병 제8사단의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했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 있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은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복무하던 시절 독립군이 만주에 있는가에 대한 논란도 있다. 1940년 이후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중국 대륙에 위치한 충칭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좌파 계열 독립군 단체인 조선 의용군에 많은 조선인들이 입대하였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며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대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후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였던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박정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만주 보명 제8단에서 근무했다. 광복이 되자 베이징으로 건나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해방 전 광복군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장교들에게 겉으로 친일을 하며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임무를 주었는데, 이후  일본군 출신인 조선인 장교들을 한국광복군에 받아주었다.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단기과정을 마치고 한국의 군대에서 육군 소위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1948년 여수, 순천 사건 연류 혐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순국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 무기직역, 2심에서 10년형을 받고 다음해 강제 예편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으로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의 사상공세를 받았다. 박정희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이현란과 동거를 하여 사실혼 관계였는데, (박정희는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했다)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고,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고, 이후 바로 사망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소령으로 복귀했고,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했다. 10월에 육영수를 소개받았는데,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렀다고 한다. 1950년 12월 대구의 성당에서 박정희와 육영수가 결혼을 했다.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 1957년 졸업한 후, 육군 소장 진급심사 대상이 되었는데 박정희의 사상문제와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경무대(청와대) 행정관 곽영주가 반대했다. 김정렬이 심사위원들을 설득하여 진급을 하게 된다. 1959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고,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1960년 7월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이종찬 장군이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는데,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다. 5월 16일 새벽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 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 그리고 6군단 포병단 제 1공수특전단 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윤보선은 정변을 반관하는 태도를 보였고,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한다. 군사정변 후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5월 18일 국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고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 7월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의장에 취임했다. 정변 직후 박정희는 깡패들을 색출해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 등 깡패와 이들을 두둔했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4.19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표 명령을 했던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다.

 

1961년에는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을 개정, 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켰다. 박정희는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했으며 매달 순정효황후 윤씨 50만환, 의친왕비 김씨 30만환, 고종 후비 귀인 이씨와 귀인 김씨에게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을 지급했다. 1962년 9월에는 영친왕과 비 이방자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1963년 환국을 추진했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김좌진,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했다. 12월 말 박정희가 전두환과 차지철 등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는데, 차지철 대위는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몇번의 권유에도 끝까지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

 

1963년 박정희

 

제5대 대통령 박정희(1963-1967)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이 되면서 1963년 12월 17일 제 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이 투표를 통해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호남 지지율이 떨어졌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오자 야당은 반대했으나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다.

국토 종합 개발 계획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켰다. 1966년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설립하였다.

 

방정희는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학생들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했다. 6.3 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8월 25일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를 비판하였다. 26일 서울시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였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1961년부터 1965년 사이 5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고 주장했다.

 

1967년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고, 민주공화당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웠다. 윤보선 후보는 이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았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과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며 비난했다. 박정희는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윤보선을 꺾고 제6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6대 대통령 박정희(1967-1971)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에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시민들이 사상당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김신조가 생포되었고, 31명 중 28명을 사살하고 2명은 도주하였다. (김신조 1.21 사태)

 

1969년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동안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고, 1973년 10월에 1874천 평의 규모로 완공되었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발표하여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약이 포함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 규모의 땅을 구매하여 농민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기후가 전혀 맞지 않고, 소금기가 많은 땅도 있는데다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이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때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며 세금을 내고 있다고 한다. 일부는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박정희는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당시 박정희 당선을 위해 600억원을 썼다고 밝혔다.

 

제7대 대통령 박정희(1971-1972)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헌법 개헌을 단행하여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제4공화국 헌법 제정을 통과시켰다.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제8대 대통령 박정희(1972-1978)

 

10월 유신으로 대통령 선출 방법을 간접선거로 개정했다. 구.시.읍.면.동 등 행정구역 단위를 선거구로 하여 전국을 1630개 구로 나누어 전국의 대의원 정수를 2359명으로 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다. 후보는 박정희 한명이었으며 2359명 중 2357표를 받아 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중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하여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쏘려 하였으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권총 두발을 맞아 사망했다. 범인이었던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를 도운 일본인 전직 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제6대 대통령 박정희(1967-1971)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제9대 대통령 박정희(1978-1979)

 

1979년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이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경찰은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 사망했다.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박정희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일어났고,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핵개발 등의 문제와 독재정권, 인권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다. 1979년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을 무시하고 주한미군 내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주장한 카터 대통령에게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 방위 뿐 아니라 동아시와와 자유세계의 방어에 얼마나 중요한지 일방적으로 강의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카터 대통령은 한국 내 CIA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했다.

 

 

박상범 전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전했다. 국민들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말기는 힘들었다.

 

1979년 10월 16일에 부산에서 시작된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20일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박정희의 죽음에 미국개입 의혹이 있었는데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부르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었다. 김재규는 이를 끝까지 부정했다. 미국의 경고에도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을 계속 시도했기에 미국을 계속해서 자극했기에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16년의 독재가 그의 암살로 끝이 났다.

 

10월 27일 국무총리 최규하는 국무회의를 소집하였고,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첫번째 부인인 김호남에서 1녀를 두었으며 두 번째 부인인 육영수에게서 1남2녀를 두었다. 육영수의 장녀가 18대 대통령 박근혜이자 대한민국 최초 탄핵 대통령이다.

이현란과는 동거로 사실혼 관계였고 실제 혼인을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가계도

박정희의 장녀 박재옥은 부모가 이혼했을 당시 13살이었다. 그녀는 친가, 외가, 사촌오빠 박재석, 사촌언니 박영옥의 집 등을 전전하였으며 계모 육영수 슬하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박정희가에 있을 때, 박정희의 부관이었던 인연으로 한병기와 결혼하게 되었다. 한병기는 설악산에 설치된 케이블카 사업 독점운영권을 갖고 이것으로 돈을 꽤 많이 벌어 유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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