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근현대사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노태우 가계도

GoodFortune 2019. 8. 30. 17:37
반응형

노태우

1932-

 

노태우는 1932년 대구에서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태우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라고 한다. 아버지 노병수는 노태우 어린시절 1939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는 숙부 노병상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1939년 공산소학교에 입학했는데 6km 떨어진 곳을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1945년 대구공업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일제시대였지만 집안에 이렇다할 공직에 몸담던 인물이 없어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대구보고 4학년에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편입학하였다. 그는 과묵하고 온순하며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1950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투입되었다. 이후 헌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 이등병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1951년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중 전두환, 정호용을 만나게 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사 11기 동기생이 된다.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1956년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는데 당시 5사단장은 박정희였다. 이후 11기생 동기들의 친목 모임인 북극성회에 가담했고 이어 하나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누이 김옥숙과 1959년 혼인을 했다.

 

1959년 전두환 등과 함께 6개월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다녀왔고 1960년 대위로 진급,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되었다. 그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대위 재직 중 전두환 등 장교들과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지지 행진에 참가했다. 1962년 북극성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67년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참전했다.

 

1968년 육군대학에 입교, 1970에 육군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의해 발탁되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었고 1978년 전두환에 의해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 당하자 전두환과 함꼐 군부를 장악하였다.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려고 할 때 최규하 권한대행이 승인을 하지 않고 버티자 노태우는 9사단의 특전부대 병력을 서울로 급파했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 주변과 정부를 포위했다.

 

이후 1980년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직을 맡았다. 1981년 퇴역 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예편하였다. 전두환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아서 노태우를 하대하여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노태우는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시 김종필 등 육사 선배들에게 깍듯이 예우했는데 김종필은 이에 감동하여 2인자의 처세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1981년 예편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여 전두환에 의해 당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예편은 노태우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노태우는 군에 남아 참모총장의 길로 가려고 했는데 전두환에 의한 예편이라고 한다. 전두환은 예편 이틀만에 정무2장관 자리를 노태우에게 주었다. 1981년 정무 제2장관, 1982년 체육부 장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3년부터 86년까지 3년간 서울올릭픽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였는데, 군 출신들이 반발하자 노태우를 후계자로 정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직선제를 주장하자,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직선제 개헌을 막으라 하였으나 노태우는 호응하지 않아 전두환과 갈등하게 되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에서 대통령 간선제로 투표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학생들과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집회를 전국적으로 열었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승락하게 된다. 노태우는 8개 항목의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했는데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두환은 수용하게 된다. 전두환이 확실한 1인자였기에 6.29 선언 또한 전두환이 기획하고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의 유세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였는데 유행어처럼 돌기도 했다. 야권은 육군 대장 출신이 어떻게 보통사람이냐며 반박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지역 유세시에 '광주 학살의 원흉'이라며 시위대가 달걀과 밀가루, 오재미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유세 초기에는 노태우는 패배를 예상하엿는데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 사태가 일어났다.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에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후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36%, 김영삼 28%로 노태우의 승리였다.

 

제 13대 대통령 노태우 (1988-1993)

 

제6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는 12.12 사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처벌을 계속해서 요청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 인사들을 기용했다. 신군부 출신들은 집단 반발했으나 노태우는 묵인했고 이 일로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치하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법관 이회창을 영입하여 정계로 발탁했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은 7.7 선언을 통해 남북간에 민족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을 선언하며 공산주의권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밝혔다. 이후 대북 비난 방송이 중단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하였고 이들과 괴교관계 수립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한 공동 개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림픽 참가를 거절하였다.

 

1989년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했다. 당시 A급으로 분류되어 사찰한 민간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국무총리, 고 문익환 목사 등 109명이었다. 이는 노태우가 5공을 답습한 것 중 하나였다.

 

 

 

1989년 5월 전교조는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는데 전투경찰은 학교를 봉쇄하였고 폭력적인 진압이 있었다. 참가했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고, 노태우는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 천명했다. 문교부 장관 정원식 역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였고 전교조 가입 인사들에 대해 탄압 정책을 계속했다. 전교조 교사들 1500명을 해직, 파면 시키자 학생운동권들은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 시위를 했다. 학생운동권 시위는 분신자살로 이어졌고 수업 거부한 세종대 학생들을 징계, 유급조치, 퇴학시키기도 했다(후에 모두 복교되었다.) 경찰 폭행치사 사건, 시위대 압살 사망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격화되었으나 노태우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뒤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5석을 획득하여 대한민국 첫 '여소야대'국회가 출범했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또한 입지가 어려워 지자 3당은 합당을 결심하게 된다. 민주세력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을 하겠다고 하자 민주당은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청문회스타'라고 불린 노무현은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결별을 선언하였고, 일부는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을 결성하게 된다. 19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합당하기로 합의를 하였고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3당 합당) 민주자유당은 합당으로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권력을 쥐게 되었고 이후 민주자유당은 날치기 통과 강행,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의 독재정치를 펼쳤다.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3당합당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했다. 이 목록에 정계,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기록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일어났다. 윤석양은 한국외대생으로 학생운동으로 제적되어 군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보안사는 윤석양을 연행하여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에 대해 조사를 했다. 윤석양은 협박에 못이겨 혁노맹 관련자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보안사는 윤석양을 신임하게 되었다. 윤석양은 이후 보안사로 배체를 받아 혁노맹 수사 일을 도왔는데 보안사의 직원이 그를 스파이로 의심하자 보안사의 디스크를 들고 탈영한 것이었다.

 

1991년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였다.

 

1991년 한국외대에서 강의를 하고 나온 정원식에게 대학생들은 계란, 유리조각, 밀가루, 페인트 등을 투척했다.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관계자를 소집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연행했다.

 

1992년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기도 하여 김영삼은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겼고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이후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고,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이 계속 되었다. 노태우는 후에 야당 인사들이게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김대중에게 20억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퇴임 후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며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돌았다.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반박하였다. 비자금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였지만, 수사가 시작되자 이에 굴복하게 된다. 1995년에 노태우는 '문화대혁명(중국)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야,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에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 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정치권의 비난까지 들끓자 노태우는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1995년 10월 정치비자금 실체가 밝혀졌고,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실을 인정하고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 원 가량 남았다고 밝혔다. 비자금 조사 결과 3500억원을 받고 대통령 선거를 위해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원이 합쳐져 자금이 조성했다고 밝혔다. 그는 뇌물수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대법원은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40여 명을 기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재벌기업인들은 전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노태우는 항소했지만,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전두환 재판

 

이와 함께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 여론이 나타났고 김영삼은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6년부터 재수사가 이루어졌고, 1997년 4월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88억원의 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2월에 사면되었다. 추징금은 2,286억원을 납부하였다.

1999년 6월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전두환과 함께 추대되었다. 이에 논란이 있었지만 집행부측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했고 설립 때까지 고문직을 유지했다.

 

사면 이후, 노태우는 건강 악화로 특별한 정치적 행보와 언론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추징금을 꾸준히 내던 노태우는 2008년에 동생 노재우와 조카 노호준을 상대로 그들의 회사가 비자금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다. 가처분 신청에 패소하였고, 231억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다. 노태우는 동생과 사돈으로부터 추징금을 추징해달라는 뜻을 밝혔고, 재산 반환 소송은 취하하고 사돈과 동생이 추징금을 납부하기로 합의하였다.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원을 납부, 노재우가 150억 4천만원을 납부하여 모든 추징금을 완납했다.

 

노태우 가계도

 

노태우는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은 접었지만 딸 노소영과 아들 노재헌은 서울대에 진학시키고, 딸 노소영은 시카고 대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딸 노소영은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88년 SK 그룹 최태원과 결혼했다. 1997년 최종현 SK그룹 회장 부인 박계희가 운영하던 워커힐미술관을 물려받았고, 2000년 아트센터나비로 새롭게 바뀐 후 관장으로 운영 중이다. 2015년 최태원 회장이 혼외자를 언론에 밝히며 이혼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는데 노소영 관장은 가정을 지키겠다며 이혼 요구를 거절했다.

 

아들 노재헌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여 법무법인 바른의 미국법자문사로 있다. 노재헌은 신동방그룸 신명수 회장의 딸 신정화와 1990년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95년 노태우 대통령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되자 신씨와 미국과 홍콩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신동방그룹도 노 대통령의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그룹은 분해되었다. 2011년 노재헌과 신정화는 홍콩법원에서 이혼소송을 하면서 23년만에 이혼하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