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근현대사

대한민국 제 10대 대통령 최규하

GoodFortune 2019. 8. 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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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1919-2006

 

최규하는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최양오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2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어학 실력이 뛰어났던 최규하는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한다.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의 3녀 홍기와 혼인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1941년 만주로 가서 만주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수료하였다. 1945년 경성사범대학 영문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다. 조교수로 재직 중 1946년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 1951년 농립무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52년 7월 도쿄의 주일대한민국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하였고 1958년 제4차 한일회담의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하였고 1959년 귀국하여 외부부차관이 됐다가 4.19 혁명 후 1960년 외무부 차관을 사입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수사대상에 올랐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1961년 5.16이 일어난지 3개월만에 김종필은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이 창당구상을 하였고 이에 최규하가 참여했다. 이들은 1962년 1월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사무실을 차렸다.

1962년 외무부장관 고문으로 복귀하고 한일회담의 고문이 되었다. 1964년 주말레이시아 한국 대사를 지내고 1967년 외부무 장관에 발탁됐다.

 

최규하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다. 박정희는 최규하의 과묵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무총리로 발탁했다고 한다. 1979년에 국무총리로 재선출되었고,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최규하는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권력을 이양받았다. 최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유신 헌법을 따라 대통령을 뽑은 뒤 개헌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발표했다.

 

1979년 11월 서울 학생 운동가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시위가 터졌다. 재야 세력들은 국민 대회를 열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유신 잔당으로 몰리면서도 당분간 방침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선언했다. 여러 단체에서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주장했으나 최규하는 단독으로 출마하여 12월 6일 대통령 선거에서 96.7%의 득표율을 얻고 당선되었다.

 

1212 사태가 끝나고 쿠대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의 기념사진

 

당시 10.26사건을 수사중이던 합동수사본부는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사건현장에 있었으며 김재규와 상황에 대한 협의가 있었음을 파악하고 12월 12일 정승화 체포작전을 벌였다(12.12 사태).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된다.

 

제 10대 대통령 최규하 (1979-1980)

 

제4공화국의 두번째 대통령인 최규하는 비상조치를 해제하고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해 새 정부 출범을 국민들에게 약속했으나 8개월만에 사임하게 되었다.

 

12월 6일 당선이 되자 12월 7일 부총리 신현확을 총리로 지명하였고, 12월 21일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최규하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에 의해 퇴임할 때까지 허수아비 대통령 역할을 했다. 국가원로들과 전 대통령 윤보선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 체제를 폐지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나회의 정치군인(전두환, 노태우)들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국방부 고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정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붙잡아 감금시키고 군부를 장악하고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1980년 2월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윤보선이 의장이 되었다.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인사 687명을 복권했다. 4월에는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이 집권자 역할을 하자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일부터 15일간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진행하였고,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시국수습방안'을 실시하도록 강요했으나 그는 반대했다. 5월 18일 신군부는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군병력으로 점거해 폐쇄하고 김종필, 김대중, 김진만 등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여 보안사로 연행했다. 김영삼, 이철승 이민우 등을 가택연금 시켰다. 이 일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최규하는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하여 형식적인 담화문을 발표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의장이 되었고, 전두환이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국보위를 통해 전두환은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하도록 했다. 허수아비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은 8월 16일 사임을 하게 되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고, 1987년 12.12 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에 출석하여 야당과 국민여론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1991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고 1993년부터 2006년까지 명예의장을 재임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증언 요청을 받았지만 이때에도 법정 증언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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