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과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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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595-673)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김유신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6대 진평왕부터 30대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기며 신라의 중요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다. 김유신은 무열왕 즉위 및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추촌되었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10대 국왕 구형왕이으로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금관가야 구형왕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며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가야에 대한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한다.

2019/09/23 - [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 철의 나라 가야와 금관가야 왕 계보도 김유신 선조

 

철의 나라 가야와 금관가야 왕 계보도 김유신 선조

가야는 지금의 경상도 땅인 낙동강 서쪽에 있던 나라로, 작은 나라가 하나둘 들어서다가 열두 나라가 되었다. 이 열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어 돕기로 하였다. (가야 연맹) 평상시에는 왕이 따로 나라를 다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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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의 목을 베어 공을 세웠고, 김무력의 장남 김서현은 대량주도독을 지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외조모는 만호태후로 지소태후와 이화랑의 딸이다. (지소태후의 첫번째 남편 입종의 아들 숙흘종과 두번째 남편 이화랑과의 딸 만호태후가 혼인한 것!)

김유신은 부계는 가야, 모계는 신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김유신 가계도

 

김유신은 595년 진평왕12년에 태어났다. <삼국사기>에서는 만명부인이 아이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8세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이 되었다. 629년 진평왕51년 아버지를 따라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김유신은 직접 나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신라군은 용기를 내어 고구려와 싸워 이겼다. 낭비성 전투는 기록상 김유신의 첫 전투이다. 당시 신라의 지휘관으로 파진찬 김용춘이 참전하였는데 김용춘의 아들이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는 김춘추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김유신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밞아 터지게 하고 옷고름을 꾸ㅖ맨다는 핑계로 김유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가 집에 드나들게 되었고 문희가 임신하자 김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혼일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김유신 가계도

또한 김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이 백제로부터 대야성이 함락되자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는 일이 있었는데, 김춘추가 복수를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요청을 하러 떠났으나 고구려에 억류되었다. 김유신은 군사1만을 모아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전쟁 방지를 위해 김춘추를 석방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김유신

 

644년 선덕여왕 때에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에 올랐다. 백제의 7성을 점령하였고 645년 백제 계백의 침공을 막았다. 647년 상대등 비담이 염종과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다.

648년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주를 공격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김유신은 진덕여왕에게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붕어하자 화백은 상대등 알천을 추대하였으나 알천이 거부하며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무열왕 즉위 후 김유신은 대각간에 임명되었고, 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했다. 김유신은 신라 왕실과 이중, 삼중의 혼인을 통해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올랐다. 660년 무열왕7년 김유신은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드라마 '계백'의 김유신

 

김유신은 5만 병사를 끌고 백제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을 만나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했고, 당나라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태자 법민(문무왕)이 즉위하자 김유신은 그를 도와 통일 전쟁을 계속 했다.

영화 '평양성'의 김유신

 

622년 문무왕2년 62세의 나이로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간 김유신은 두려워 하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앞서 배를 건너고 혹한기에 지친 병사들 앞에서 웃옷을 벗고 직접 말을 몰아 이끌었다고 한다. 당의 소정방에게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알렸으나 당의 소정방은 신라군에게 퇴각을 알렸다. 김유신은 퇴각 길에 교란작전을 펼치며 퇴각하며 고구려군을 역습하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였고 그해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신라를 노렸고,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672년 신라군은 당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였는데, 이때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살아오자 김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이 이를 거절하였으나 원술은 김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고 한다.

 

673년 봄, 김유신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은 신라 42대 흥덕왕 대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은 신라 화랑도의 19대 풍월주로 660년 황산벌 전투에 김유신과 함꼐 출정하였다. 계백의 군대에 신라군이 4번 패하자 아들인 반굴을 전장에 투입해 싸우다 죽게 하였다. 이를 본 장군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을 적진에 보내 죽게 하자 이를 본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가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한다.

 

 

 

 

김유신의 첫번째 부인은 영모부인으로 11대 풍월주 하종의 딸이었다.  두번째 부인 유모부인 역시 하종의 딸로 영모부인과 자매지간이었다. 무열왕과 문명왕후 소생의 지소부인은의 아들 김원술은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뒤 숨어지냈다 하며 다른 부인 천관부인은 기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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