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철의 나라 가야와 금관가야 왕 계보도 김유신 선조

GoodFortune 2019. 9. 2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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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지금의 경상도 땅인 낙동강 서쪽에 있던 나라로, 작은 나라가 하나둘 들어서다가 열두 나라가 되었다. 이 열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어 돕기로 하였다. (가야 연맹) 평상시에는 왕이 따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큰일이 생기면 하나의 나라처럼 움직였다. 열두 나라 중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의 힘이 가장 컸으며, 금관가야가 이끌어 가는 열두 나라를 '가야' 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가장 힘이 커진데는 철의 힘이 컸다. 금관가야는 김해에 위치하고 있었고, 철광산이 많이 있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여 금관가야 사람들이 만든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아주 뛰어났다. 금관가야의 이름 또한 '쇠를 관리하는 나라'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금관가야는 왜와 낙랑에 철을 팔고 귀한 물건들을 들여와 서로 다른나라에 되팔아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다. 금관가야는 낙랑과 교역을 많이 하였는데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무너지자 왜와 낙랑의 중간교역이 어렵게 되었다. 금관가야의 힘이 약해지자 주변 나라들은 등을 돌렸고 가야의 여덟나라가 힘을 합쳐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 근초고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오고 왜에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는데 남해의 바닷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백제는 금관가야의 바닷길을 이용하며 금관가야에 대가를 지불했다.

 

 

그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의 땅을 빼앗고 중국과의 교역을 방해하자 백제는 금관가야, 왜와 힘을 합쳤고 고구려는 신라와 손을 잡았다. 고구려군은 왜군을 무찌르고 금관가야까지 쳐들어왔다. 금관가야의 국력은 약해졌고 가야의 작은 나라들도 흩어졌다. 이때 금관가야의 철제 기술자들을 받아들여 반로국은 힘을 키우게 된다. 반로국은 철기를 바탕으로 힘을 키워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를 이끌었고 이름을 '대가야'로 바꿨다.

 

고구려 장수왕은 영토 확장을 위해 백제와 신라로 남진하였고, 가야는 틈을 타서 백제의 동쪽 땅을 차지했다. 이 시기 가야 하지왕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어깨를 겨루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이 주춤해지자 백제 무령왕는 가야를 공격했고, 가야는 백제를 막기 위해 신라 법흥왕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신라 법흥왕은 가야를 점차 공격하였고 가야의 동쪽 지역이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이때 백제 성왕과 동맹을 맺어 신라를 공격했으나 백제 성왕이 전사하며 패하는 바람에 가야는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신라 장군 이사부는 562년 대가야까지 쳐들어왔고 가야는 신라에 항복하며 멸망하였다.

 

 

그럼 금관가야의 역대 왕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1대 김수로왕

재위 42-199

 

가야 지방에는 9명의 촌장이 각자 자기 땅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42년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 보니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로 내려온 노래가 구지가 이다) 이에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매달린 금빛 상자가 내려왔고 상자 안에 6개의 금란이 있었다. 12일이 지나자 알 속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고,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알에서 깨어난 소년이 수로왕이었고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함께 태어난 이진아시왕은 대가야를 건국했다.

드라마 '김수로'의 가야 허왕옥

 

설화에서 김수로는 석탈해와 재주를 겨룬 뒤 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석탈해는 신라 3대 국왕 유리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신라 4대 국왕이다. 김수로는 157년을 살았고, 부인은 월지국의 공주로 추측되는 허왕옥이며 189년까지 158년을 살았다는 신화가 있다. 허황후는 48년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고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아들 10명 중 2명에게 허씨 성을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두 아들은 김해 허씨로 이어졌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딸 묘견공주는 석탈해의 장남 석구광과 혼인하여 딸을 낳았고 김알지와 혼인한 마정부인이다.

 

 

신라 문무왕 때 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문무왕은 김수로의 15대 외손에 해당된다.

 

2대 거등왕

재위 199-253

 

3대 마품왕

재위 253-291

 

4대 거질미왕

재위 291-346

 

5대 이시품왕

재위 291-346

 

6대 좌지왕

재위 346-407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좌지왕대의 외척과 관련된 갈등이 있는데 용녀라는 여인을 왕비로 맞고 그 무리를 리로 임명한 뒤 신라가 꾀를 써 치려 한다는 기록으로,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에게 간해 용녀를 귀양보내고 대아간 도령의 딸 복수를 아내로 맞았다.

 

7대 취희왕

재위 407-451

 

8대 질지왕

재위 451-491

 

질지왕은 452년 수로왕과 허왕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란 절을 짓고 밭 10결을 바쳤다.

 

9대 겸지왕

재위 491-521

 

10대 구형왕

재위 521-532

 

532년 신라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 군사적으로 열세하여 신라로 들어가 항복했다. 구형왕은 아들들과 함께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구형왕의 차남 김무력은 신라의 장국이 되었다.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백제 성왕의 목을 베는 성과를 올렸다. 첫부인 박씨는 법흥왕 왕비 보도부인의 동생으로 김무력은 법흥왕의 동서였다.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아래는 구형왕부터 김유신에 이르는 김유신의 선조를 정리했다.

 

가야 김유신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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