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신라 3대 화랑 관창 사다함 김유신

GoodFortune 2019. 9. 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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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3대 화랑 관창 사다함 김유신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겠다.

 

먼저 신라시대의 화랑은 신라 진흥왕(576년) 때에 인재 선발을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초기에 원화로 시작되었는데 여성 우두머리가 낭도를 거느린 조직이었다. 원화인 남모, 준정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자 남성을 우두머리로 하여 소년들로 구성된 화랑을 창설하였다. 풍월주, 화랑, 낭두, 낭도 등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위계가 있었다. 화랑들의 우두무리가 풍월주인 이유로 풍월도 라고도 하였고, 선도를 따른다 하여 국선도 라고도 불렸다. 대체로 왕과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무열왕, 경문왕 등도 화랑 출신이었다고 한다.

무열왕, 문무왕에 이르는 동안 가장 흥왕하였다가 그 후로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으로 일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국선으로 부활되어 신라 말까지 계속 되었다.

 

화랑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준수했다.

  1.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2.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3.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4.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5. 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김유신에 대한 포스팅은 아래로 대신한다.

 

2019/09/23 - [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과 가계도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과 가계도

김유신(595-673)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김유신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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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의 관창

관창(645-660)

신라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의 조카이다. 15세에 말을 타며 활 쏘는데 능하여 김춘추에게 천거되었다. 황산벌에서 신라와 백제가 전투를 벌일 때 백제 계백에게 신라군이 4번을 패하자 다섯번째 싸움에 관창은 선봉에 서서 적군 속에 들어가 싸우다 백제의 포로가 되었다. 백제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맹에 감탄하여 죽이지 않고 신라군에 되돌려 보냈는데, 관창은 부끄러워하며 다시 돌입하여 싸우다가 또다시 포로가 되었다. 계백은 관창을 다시 풀어주었으나 관창이 또다시 돌격해오자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죽였다. 신라군은 관창의 용기에 고무되어 모두 결사의 각오로 싸워 백제군을 대파하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사다함

 

 

사다함(54?-564?)

신라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에서 활약한 화랑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었다. 조모 벽화부인은 신라 21대 소지 마립간의 부인으로 그녀는 23대 법흥왕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벽화부인은 비량공과의 사이에서 구리지를 낳았다. 어머니 금진낭주는 초대 풍월주 위화랑과 오도낭주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562년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는데 사다함은 15-6세의 나이로 출진을 간청하여 나서게 되었다. 사다함은 선봉으로 앞장섰고 크게 승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랑인 무관랑이 죽었는데 죽음을 같이 하기로 했던 그는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의 어머니가 무관랑과 사통하여 들키자 무관랑은 주변의 비난을 받게 된다. 사다함은 무관랑을 불러 위로해주었으나 무관랑은 다리를 다친 후 며칠만에 죽었다고 한다. 사다함은 미실과 정인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을 하자 청조가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하며,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미실은 세종과의 관계에서 아들 하종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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