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공녀로 가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

GoodFortune 2019. 8. 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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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1315-1369

 

아버지는 기자오, 어머니는 이행검의 딸 이씨였다.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 오빠들이 있었다.

 

공녀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에서는 13세에서 16세까지 처녀들을 원나라에 보내야했다. 1232년부터 원나라에 공녀를 보냈는데 조선 세종 때 되서야 폐지되었다.

 

1232년(고종19) 몽골의 1차 침입 직후 처음 요구했으며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80년 동안 기록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다. 당시 고려에서는 딸이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깎아 출가시키거나 어린 나이에 혼인시키기도 했다. 원에 끌려간 공녀들은 대부분 황제, 황부, 황족들의 시녀로 들어가 힘겨운 생활을 해야했다. 간혹 중국이나 몽골의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거나 비빈으로 간택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출신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은 이씨, 원나라 4대 황제 인종 때에 영비 달마홀도, 원말의 기황후와 권황후, 조선의 여비 한씨와 공신부인 한씨는 궁녀 출신이었다. 권황후는 기황후의 며느리로 원 소종의 황후였다. 아버지는 권겸으로 공민왕 초기에 딸을 원나라 황태자에게 바쳤다. 여비 한씨와 공신부인 한씨는 조선 출신의 명나라 후궁으로 자매이다. 두 자매는 조선에서 공녀로 바쳐져 여비 한씨는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공신부인 한씨는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한확의 누이이며 소혜왕후(=덕종비,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이다. 여비 한씨는 영락제의 황후인 인효문황후 서씨가 죽은후 명나라 내명부를 총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여비 한씨는 순장되었다. 공신부인은 1427년(세종9) 명나라로 들어가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선덕제 사후에도 정통제(영종), 경태제(대종), 성화제(헌종) 등 57년간 4대의 황제를 섬기다가 74세 사망하였다. 여비 한씨와 공신부인의 남동생인 한확은 그녀들의 덕을 보았다.

 

기씨는 공녀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를 만났다. 고용보는 기씨를 보고 적극 추천하여 원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2) 고용보의 추천으로 황태자궁에 배치되고, 원 11대 황제 혜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기황후

원 명종의 장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은 1330년에 원 황실 내부싸움으로 대청도에 1년 5개월 유배되었다가 2년 뒤에 황제에 즉위한다. 원 혜종은 기씨에게 큰 호감을 가졌고 혜종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펼치기로 한다. 혜종의 황후 타나실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하고 인두로 지질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타나실리의 친정에 불만이 있던 원혜종은 1335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혜종 왕비 타나실리

 

타나실리가 폐위된 후 기씨를 황후 삼으려 하였으나 실권자 메르키트 바얀이 반대가 심했다. 1337년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를 황후로 삼았다. 기씨는 원 혜종을 조종해 메르키트 바얀의 축출을 기도했고, 황제를 찾아가 메르키트 바얀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였다. 혜종은 기씨의 말을 듣고 메르키트 바얀을 축출했다.

 

기씨는 1339년 황자 아유시리다라를 낳았고, 제2왕후로 책봉되었다. 기씨가 왕후가 되자 아버지 기자오는 영안왕으로 봉하고 후에 추봉하여 경왕이 되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또한 기철은 덕성부원군,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

 

기황후와 원 혜종, 아들 아유시리다라

 

기황후는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정원에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을 등용하여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했다.

 

기황후는 자신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혜종에게 압박하였고, 1353년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기황후는 고려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 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는데, 황태자 반대파의 지도자 볼라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했다. 아유시리다라는 황태자 지지자 코케 테무르에게 피신하였고, 1365년 대도를 공격하여 불라드 테무르를 죽였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고려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었는데, 기철은 친원파들과 원이 충혜왕을 퇴위시키도록 하는 등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는 한편 전횡을 일삼았다. 1356년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기철 일파를 비롯한 친원파를 제거했다. 공민왕은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불러들여 기철과 권겸을 함께 주살하였다.

 

기황후는 집안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고,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했다. 1364년(공민왕13)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겠다 했으나 고려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했다. 덕흥군은 최영,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했다.

 

 

1365년 제1왕후인 바얀 후투그가 죽자 기황후는 정후가 되었고, 고려 출신 여성인 권씨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당시 원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였고, 각지의 반란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반란 세력을 통일하여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원나라는 멸망하였다.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는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북원 소종으로 즉위하였다. 아유시리다라는 권황후로부터 딸만 1명 남기고, 후손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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