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일제강점기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 / 이완용 가계도

GoodFortune 2019. 8. 1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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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1926

 

이완용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우봉 이씨이다. 1867년 10세에 친척인 예방승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며 양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이호준은 당대 정계의 거물로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한성부 판윤 등 최고위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다. 이완용은 이릴적 머리가 비상하고 문리를 일찍 깨쳐 집안의 주목을 받았다.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아할 때는 달성하려 노력했고, 꼼꼼해서 학업 성취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한다. 13세에 양주 조씨와 혼인하였고, 1882년(고종19) 25세의 나이로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 1886년 조선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 과학, 경제학 등 신문물을 배우고 홍문관 응교 등으로 승차했다.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보덕에 보임돼 완세자 순종을 가르쳤다.

 

이완용

 

1887년(고종24)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주차미국참사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했다. 이후 이조참의 겸 전보국회판, 외무참의를 역임했다. 1888년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대사성, 교환서총판, 우부승지, 내무참의 등 각종 요직을 역임했다.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지만 조선왕실에 대해 개화를 주창하지 않았으며 유교와 전통사상을 고수했다.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성균관을 개편해 지리, 산술, 과학 등의 과목을 신설했다.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을 중심으로 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정동파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박영효 등 도쿄에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조선에 돌아왔다. 그들은 청에 의존했던 민씨 정권을 쫓아내고 2차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 부른다. 이때 개화파들은 이호준과 이완용에게 손을 내밀자 189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 겸 중추원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한다. 갑오개혁이 실패하고 박영효와 개화파는 명성황후 시해 책모 등 역적 누명이 씌워져 조정에서 쫓겨났다.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와해되고 박정양이 과도정부의 내각총리가 되자 이완용은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영효 등 개화파의 급진정책에 반대하며 온건책을 견지하였다. 1895년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 중추원의관이 되었으며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를 열어 근대적 교육정책을 펼쳤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대원군이 주도하는 제4차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이완용은 해임되었다.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머물며 감금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켜 천러내각의 복원을 시도하였고 춘생문 사건이 일어났다.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1월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이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된 고종을 친미, 친러, 개화파가 탈출 시키고자 하였지만 실패했다.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이자 1896년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광무 연호와 제위를 허락했는데, 이때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승인을 얻었으며 대내적으로는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친미국파를 독립협회에 가담시키고 이완용 등과 계몽강연 활동에 나섰다. 이완용은 득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 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다. 이완용은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그시절 이완용은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독립협회 내 핵심요원 중 한명이었다. 점차 친미 개화파 계열의 윤치호, 서재필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며 황실과 유생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독립협회 내 균열이 생겼고, 이완용은 사퇴하게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완용은 중재하려 하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배척되었다.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1897년 이완용을 내각에서 밀어내고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시키고 1898년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시켰다.

 

1901년에는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였는데, 이에 이완용은 3년상을 치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이완용을 통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미국이 거부하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러시아도 미국도 거부하자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다. 이완용은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해 11월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의 체결을 만들었고 그렇게 을사오적의 한사람이 되었다.

당시 이완용이 남긴 말이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은 친일의 길에 들어서며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12월 의정대신 서리와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하였고, 1907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이완용은 자신들에게 향하는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축출된 남인, 북인 등의 복권을 시도했다. 이완용에 의해 77명이 사면복권되었다.

 

이후 이완용은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이완용의 집은 반일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당시 순종 즉위식을 주관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개화파인 박영효는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서 10년을 보냈고 깁오개혁 실패로 12년을 일본에서 지낸 후 귀국했는데, 박영효는 양위를 막기 위해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서 애를 썼다. 양위가 확정되자 그는 다시 궁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완용이 대신 양위식을 강행했다.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의 거물 박영효는 고종 양위 이후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순종에게 올렸다. 박영효는 구속되었고,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을 역적이라 했을 뿐 나는 무죄다"라고 강변했지만 제주도로 유배보내졌다. 순종에 의해 유배형에서 도성 출입금지령으로감형된 박영효는 1910년 한일합병의 비보를 듣고는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은채공사금 28만원을 받고 조선귀족에 편입되었다.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이었다.)

 

순종 즉위 후 이완용은 정미7조약을 추진하고 기유각서를 맺으며 대한제국의 권리를 하나씩 일본에 넘겼다.

 

 

 

1907년 8월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황제의 막내동생 영친왕이 결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고종의 장조카 영선군과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해 실질적 권력을 쥐려했던 고종의 욕심과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됐고, 11월 서울 남산 추도회에서 이완용은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했다. 12월에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찌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이채명은 이완용 살인미수와 당시 인력거꾼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였고 곧 관직을 사퇴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퇴직금을 받고 은사공채금 15만원을 받았다.

 

백작이 된 이완용은 1912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랐고,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문안인사를 갔고, 조선인 귀족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1918년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다. 당시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고종황제 승하로 인해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탄압 필요성과 방안에 대한 편지를 수차례보냈다. 이완용은 이후로도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1926년 2월 이완용은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완용의 장례식은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이완용은 장례식날 매국친일의 대가로 일본 황실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한국인은 영친왕 이은, 의친왕의 장남 이건, 차남 이우 왕족 3명과 이완용이다.

 

이완용 가계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1881-1945)는 1905년 일본공사관 3등 참서관이 되었고 이후 정치생활을 계속하였다. 1918년 이왕직 의식과장을 지냈고, 1932년에는 이왕직 차관으로 승격, 장관까지 역임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아버지 이완용과 함께 수록되었다.

이완용의 장손주 이병길(1905-1950)은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장손이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했고 1937년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동요회 이사장이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다. 이완용과 그의 아들 이항구, 손주 이병길은 3대가 모두 반민족행위자에 기록되었다. 둘째손주 이병주(1913-?) 또한 일본에서 유학했고,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큰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이완용의 직계후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증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하여 조상땅 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1998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에서 승소하였는데 반환받은 토지를 매각하여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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